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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유고집‘낡은 옷을 벗어라’

2020-01-30 (목)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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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적 10주기 앞두고 칼럼 등 68편 묶어 단행본 발간

법정 스님(1932~2010)의 대표저서는 ‘무소유’다. 그를 우리시대 큰스승 반열에 올려놓은 키워드 역시 무소유다. 무소유를 주창하고 무소유를 실천하며 그가 꿈꾼 세상은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다. 스님을 따르는 법우들의 모임 이름 역시 ‘맑고 향기롭게’다.

2010년 3월11일(음력 1월26일) 육신을 벗기 전에 법정 스님은 다시금 법정다운 유언을 남겼다. 많은 사람 수고만 끼치는 장례의식을 하지 말 것이며, 관이나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입은 승복 그대로 다비할 것이며, 사후에 (스님 관련) 책을 출간하지 말 것이며...

간소한 장례의 뜻은 알겠는데 아무리 퍼뜨려도 부족할 것 같은 스님의 귀한 말과 글을 더 이상 퍼뜨리지 말라고? 스님은 당신의 말과 글마저도 ‘공해’라고 했다 한다. 아쉽지만, 그리고 공해라는 자책성 진단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그 유지는 지켜졌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다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스님을 너무나 존경하기에 스님의 유지를 존중하지 않는 ‘귀하고 반가운 소동’이 벌어졌다. 생전에 스님이 논설위원으로 칼럼니스트로 주필로 활약했던 불교신문이 스님 원적 10주기(스님의 기일은 양력 3월11일 대신 음력 1월26일)를 앞두고 유고집 ‘낡은 옷을 벗어라’를 펴냈다. 여기에는 스님이 1963∼1977년 불교신문을 통해 발표한 시 설화 논단 서평 등 68편이 담겼다.
68편의 원고는 성격별로 11개 영역으로 분류됐고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극히 일부 단어나 문장이 현대어법에 맞게 수정보완됐다 한다. 필요한 경우 보조제목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도 했다.

세속에서 횡행하던 졸속주의를 신성한 불사(佛事)에서만은 “제발 되풀이하지 말자”고 강조하며 “만약 오늘 이 땅에 부처님이 출현해서 말씀을 하신다면 어떠한 말씀을 어떻게 하실까?...철 지난 옷을 언제까지고 걸치고 있으려는 고집은 이제 웃음거리밖에 낳을 것이 없다”고 개탄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불교회관 건립을 위해 서울 봉은사 부지가 팔린다는 소식에 “그 회관을 세우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지금 당장 봉은사 같은 도량을 팔아서까지 회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시급한 일인가”라고 비판하는 글의 제목은 섬뜩할 정도다, ‘침묵은 범죄다-봉은사가 팔린다’였으니.

1964년 여름에 부처님께 올리는 편지 형식으로 쓴 ‘부처님 전 상서’는 또 어떤가.

부처님! 극락행 여권을 발급하고 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암흑의 계절 중세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절’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대찰(大刹)들에서 버젓이 백주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야시장도 아닌데 이런 넋두리까지 걸쳐서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사가시오.” 하고 말입니다.

두어해 뒤에 쓴 ‘성탄聖誕이냐? 속탄俗誕이냐?’ 칼럼은 자칭타칭 불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관습을 따르느라 깜박 놓친 사실을 아프게 지적한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절 주지 스님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이 장꾼처럼 모여서 웅성거렸다. 이날을 위해 충성스런 신도들은 백일 전부터 기도를 붙였다는 것이다. 주지께서는 새로 만들어온 값진 옷을 입고 치맛자락에 둘러싸여 희희낙락(喜喜樂樂) 화기 띤 얼굴로 비단 방석 위에...

4월 초파일! 이날은 부처님이 탄생한 날이 아니다. 실달태자(悉達太子)가 자기 엄마한테서 나온, 그러니까 한낱 속인(俗人)의 생일이다. 부처님에게도 굳이 생일이 있어야 한다면, 그날은 성도(成道)한 날이어야 할 것이다. 8만4천 번뇌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지혜의 눈’을 뜨면 바로 그날이라고. 섣달 초여드레! 겨우 ‘마지’나 한 불기 올리는 것으로 소홀히 해치우는 그 성도절成道節을 우리는 해마다 보아오고 있다. 사문보다는 왕자의 쪽이 부러워서일까? 아니면 그때는 등이 팔리지 않아서일까?......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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