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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 대승사의 창건주 겸 초대주지는 정윤 스님이었다. 청년기인 1967년 해남 대흥사에서 출가한 그는 전국 각지 선원과 암자 등을 돌며 수행하다 1980년대 미국에 와 동서부 여러 한인사찰에서 참선을 지도했다. 산호세 정원사(주소지는 서니베일)은 그중 하나였다. 그런 끝에 그는 1997년 11월 인근 산타클라라 주택가에 대승사를 개원했다. 산타클라라는 지구촌 IT산업 중심지 실리콘밸리의 중핵도시다. 그런 만큼 대승사는 출발 때부터 북가주 한인사찰 가운데 중장년층 IT전문가 신도비율이 가장 높았다.
신생사찰임에도 대승사는 이렇다할 자금난을 겪지 않고 집값을 20년도 안돼 다 치렀다. 짱짱한 신도들 덕분만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돈과 물건을 아껴 쓰고 다시 쓰는 정윤 스님의 검소함 덕분이기도 했다. 카멜 삼보사 주지를 지낼 때나 삼보사를 떠나 남가주와 타주로 옮긴 뒤에도 가끔 대승사에 들렀다는 범휴 스님에 따르면 정윤 스님은 혼자일 때는 국수 한 사발 간장 한 종지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한다. 그렇다고 막무가내 자린고비는 아니었던 것 같다. 2010년에는 스님과 신도들 1인당 한달에 3불씩 모아 불우이웃을 위해 쓰자는 ‘음지를 양지로’ 캠페인을 주도해 그해 말 한국의 능행 스님이 운영하는 ‘정토사관자재회’에 보시했다.
먹을 것 입을 것조차 바싹 조리차한 탓이었을까. 안그래도 지병이 있었던 정윤 스님의 건강은 대승사가 안정되는 것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악화됐다. 그 속에서 스님은 대승사를 고향사찰이자 출가사찰인 대흥사에 보시했다. 대승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제1호 해외말사가 된 배경이다.
헤이워드 언덕 위에 넉넉하게 자리해 신도들의 발길이 잦았던 ㅂ사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이방인의 관리하로 넘어간 뒤 다시 몇 년 지나 소리소문 없이 처분돼 스님의 쌈짓돈이 돼버린 경우, 샌프란시스코 ㅂ사가 집값 만기상환을 앞두고 일이년이 멀다 하고 주지를 갈아치우는 등 불안정한 운영으로 신도들의 발길이 줄어들게 돼 이제는 거의 빈집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경우 등과 대비돼, 정윤 스님의 대승사 처리는 모범사례로 오르내렸다.
그러는 가운데 스님은 육신을 벗었다, 여느 때처럼 대승사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6년 전인 2014년 이맘 때 일이다. 스님의 입적이 발견된 날은 그해 1월23일, 스님이 주재한 마지막 일요 정기법회는 나흘 전인 1월19일이었다.
정윤 스님의 생전 마지막 법회 주재일로부터 정확히 6년이 된 2020년 1월19일(일), 길로이 대승사(주지 설두 스님) 임시법당에서 ‘정윤 큰스님 열반 6주기 추모법회’가 열렸다. 설날법회를 겸한 이날 법회에서 설두 스님은 “빨리 절이(대승사 이전불사가) 되어가지고 (정윤 큰스님) 제사를 크게 한번 모시고자 하는데 마음과 뜻대로 이게 안되네요”라고 송구함과 아쉬움을 표했다. 진수성찬은 결코 아니지만 정윤 스님의 생전 공양상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건 차례상 앞에서 오십여 신도들은 홀로 혹은 두세명이 짝을 이뤄 차례로 엎드려 절을 올렸다(사진). 차례상 너머 사진틀 속 스님의 얼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스님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웃는 듯했다.
한편 설두 스님은 본사인 대흥사 방문을 위해 이날 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윤 스님에 이어 대승사를 이끌고 있는 설두 스님은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생활공동체형 도량을 목표로 길로이에 드넓은 터를 마련하고 이전불사를 추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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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