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지우개

2020-01-03 (금) 12:00:00 박명혜(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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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연필로 쓴다고, 지우개로 지운다고 사랑의 감정이라는 게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히겠는가! 그저 세월이 더해질수록 희미해지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맘이 또다른 감정들로 새로움을 갖게 되고, 어느 시점엔가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시련의 아픔은 지우개로 지워 아릿한 추억을 만든다지만, 살다 보면 그럴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투자를 할 때 시험을 볼 때 또 직장을 택할 때 사인 하나 잘못 하고 나면 지우는 그 과정은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때론 인생이 아주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한 출판사가 유명한 과학자 110여 명을 대상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많은 대답 중에 더글러스 러쉬코프라는 과학저술가는 ‘지우개’를 꼽았다 한다. 그 이유는 되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면 과학, 문화, 도덕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2000년도 넘는 역사에 ‘지우개’가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그의 주장에 난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지금의 과학 발전을 위해 그 누군가는 밤을 새워 쓰고 지웠을 것이며, 새로운 문화의 탄생은 지난 세월의 지움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현재를 빛나게 하고, 미래를 구상할 많은 일들은 세월을 흘려만 보내고 때마다 미련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몫은 아니다. 잘못됐다는 걸 알았을 때 과감하게 지우고, 용기 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바뀐다고 이젠 특별한 계획을 세운다거나 거창한 목표도 없다. 그저 올핸 미련스레 잡고 있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나 잘못된 습관은 ‘지우개’로 지워 보려 한다. 지워 없애야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첫 실천은 찍고 나서 관리하지 않아 꽉 찬 핸드폰의 사진 폴더부터 시작했다. 지우려니 지난 사진을 훑어보아야 하고, 보다보니 생각도 결심도 생긴다. 지워서 비어진 공간에 욕심내지 않고, 또 한해를 채울 것이다.

<박명혜(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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