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우개

2019-11-24 (일) 10:21:47 박지연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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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준비 없이 떠난
그의 자리가 마냥 어수선하다
집 안 구석구석 숨 쉬는 그의 흔적들
자칫 그가 살아있는 듯하다
옛이야기 풀풀 쏟아져 나오는 편지 꾸러미
정성스레 수집한 책과 카드
함박웃음 터지는 사진첩
애지중지 손 때 묻은 저 많은 무지갯빛 추억들
나는 그의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가 되었다

문득
내가 가면 내 흔적을 누가 치워 주려나
생각하니 홀연 놀랍기만 하다
어지럽도록 많은 것들
이제부터 내 손으로 치워야겠다
미련도 애착도 가슴에만 담고
밀물에 씻기듯 말끔히
잘 못 쓴 글자 지우는 것만
지우갠 줄 알았더니
살아온 흔적 지우는 지우개도 있음이라
이 나이 들어서야 실감한다

<박지연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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