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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웨슬리 속회의 재발견(3) 북한선교를 위한 소그룹 운동

2019-10-31 (목) 김홍기 박사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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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속회의 방법론은 18세기 산업혁명과정에서 노동자 속회, 농민 속회, 광부 속회로 이어졌다. 12명을 단위로 속회처럼 영적 자아성찰과 노동현장에서의 자아성찰이 활성화되어 인류 최초의 산업혁명 속에서도 피를 흘리는 혁명과정 없이, 노동자와 농민과 광부들의 불만 없이 오히려 그들을 치유하는 복음과 영성수련이 되어 감리교운동은 영국사회의 사회적 성화운동의 불을 붙여갔다. 그래서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된 고려인들이 공산당시절의 자아비판의 훈련을 받은 것이 예수 자아비판으로 이어지니까 신앙생활하기에 쉽다는 것이다. 실상 칼 마르크스가 영국에 가서 3년 동안 머물면서 그의 [자본론] 저술을 하는 동안 감리교회의 속회운동에서 공산당 세포조직과 자아비판을 배운 것이다. 그래서 북한선교는 공산당 자아비판 대신 예수 자아비판의 웨슬리적 속회운영방법을 활용하면 아주 선교의 문을 쉽게 열 수 있다 오늘날 선교의 문, 통일의 문이 열리면 교회중심의 선교보다 소그룹중심의 선교가 더 열려야 한다.

19세기 속회의 쇠퇴 원인

감리교도의 중산층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노동자와 농민과 광부의 감리교도들이 급격하게 중산층화 되면서 영적 신앙생활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의 중산층화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전 사역에 가장 무관심하게 되는 모든 유혹 중에서 부자들의 교활함이 가장 크다.....지난 50년간에 내가 본 수천의 증거가 그것을 말해준다. 부자들은 교활하다.....그들은 그들이 가난했을 때보다 훨씬 덜 거룩한 성화생활을 힘쓰지 않고 있다.”

합리적 과학적 성서 비평학의 영향:

합리적 과학적 성서 비평학의 발전과 함께 감리교 설교가들의 설교들은 학문적이 되어버렸고, 예배형태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형식적이 되어버렸다. 속회도 자연히 감성적 체험적 분위기보다는 지성적 학문적 분위기로 바뀌어가면서 생명력을 상실하였다.

영적 책임의식(accountability)의 상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속회 안에서의 내적 경건에로의 몰입은 상호간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돌봄에도 무관심하게 되었고,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활용하는 것에도 무관심하게 하였으며, 실제적 선행생활에도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속회지도자의 훈련부족:

19세기에 감리교도들이 급격히 증가하자 고도의 양적 증가는 질적 영성훈련을 약화시켰다. 1830년대의 부의 증가는 속회제도에 대한 무관심과 연결된다. 전도의 성공이 속회의 실패를 가져왔다. 대형화된 교회와 성화된 감리교인, 둘 모두를 가질 수 없었다. 미국감리교회사가 노르우드(Frederick Norwood)도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전도는 거대한 제도를 만들고 숫자의 증가를 가져오게 하고 조직화의 결실을 가져왔지만, 성화훈련의 알곡보다 제도의 쭉정이를 만들었다고 해석한다.

속회의 교회 갱신 사명의 상실:

시간적 상황적 변화가 콘월의 주석광부들과 킹스우드의 석탄광부들과 드루리 래인(Durury Lane)의 매춘부들을 변화시키던 때와는 달리, 속회를 제도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속회는 본래 제도적 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 무기력을 쇄신시키고 갱신시키는 작은 교회 “ecclesiola in ecclesia(교회안의 작은 교회)“였다. 제도적 교회의 대형화와 함께 속회도 또 하나의 교회제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김홍기 박사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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