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버리지 못하는 버릇

2019-10-28 (월) 07:52:01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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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경력 50년이면 무엇이 언제 필요하게 될지 미루어 짐작하게 되니, 식기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여보, 이것 버릴 거야, 말 거야?” 아침 식사 때 빵에 발라 먹던 치즈통이 바닥을 드러낸 모양이다. “아니야, 필요해. 쓸 때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해서 모아둔 크고 작은 플라스틱통과 유리병이 선반 위에 가득하다. 가볍고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는 채소 데친 것, 냉동불고기, 갈은 마늘, 잘라 놓은 생선, 명란젓갈류, 등등을 담아 냉동실에 넣어 그때그때마다 하나씩 꺼내어 사용할 때는 간편하기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야채 통과 단단한 쿠키그릇은 내용물을 넣어 부담 없이 지인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딛고 생소한 부엌살림을 시작할 때부터 한국과 달리 마켓이나 백화점을 들리면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갖고 싶은 물건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지금도 세련된 꽃무늬의 길고 넓은 타월과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영국왕실풍의 우산은 뉴욕의 삭스백화점에서 사와 아직도 기념으로 지니고 산다.
1970년, 뉴욕 플러싱은 내 첫 보금자리가 있던 곳이다. 지하철 입구에는 울워스백화점을 비롯하여 맘엔팝(mom & pop)의 작은 가게들, 빵집, 보석가게, 사진관 등등…. 모든 것이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질서정연하고 아기자기한 거리였다. 이들 상점에서 구입한 예쁜 터퍼웨어 (tupperware) 용기에 담긴 음식은 먹고 나면 차마 그릇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에는 비닐봉지가 아닌 누런 종이봉투에 물건을 담아 주었는데, 들고 올 때 바삭거리는 종이의 질과 촉감이 좋아 사용한 후에는 차곡차곡 접어 모아두곤 하였다. 내가 아는 친척 한 분은 종이봉투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서 그 공장의 매니저가 되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 때 대다수의 교포 1세들이 이민 와서 취업한 곳은 영어가 크게 필요 하지 않은 생선가게, 야채가게나, 주로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장이나 세탁소 등이었다.

몇 년 전 뉴욕 플러싱을 반세기만에 다시 방문 할 기회가 있어 우리가 살았던 동네와 주말이면 산책 삼아 머리도 식힐 겸 즐겨 찾았던 키세나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던 키 작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평화롭던 길가 단층집들과 공원 벤치에 앉아 햇살을 즐겼던 아늑한 전원풍경은 사라지고, 이제는 지하철 입구에 밀집해 있는 건물과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간판들만이 내 환상을 깨웠다.
어느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음식을 함께 나눌 좋은 사람과의 만남도 점차 소원해지는 요즈음이다. 세월이 가면 사람이나 물건이나 손때 묻고 바래지는 건 자연의 이치이거늘, 버리지 못하는 내 버릇도 이제는 슬슬 버릴 때가 되었는가 보다.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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