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해!” 우리 모두가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말이다. 학창시절 하루 종일 학교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진로를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강박이 같은 반 친구 모두에게 진하게 묻어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하고 싶은 일’의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자신이 희망하는 활동이다. 춤추고 노래하며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일, 길고양이를 먹이고 돌보고 입양 보내는 일, 종이를 꺼내놓고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 하루 종일 예능을 보며 누워서 감자칩을 먹는 일 등.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말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너무 피곤해서 침대와 당장 한 몸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너는 네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구나” 라고 말하지는 않듯이.
‘하고 싶은 일’의 함의는 사전적 의미보다 훨씬 넓다.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려면 필요한 제반 사항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그 일을 하면서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 그 일을 빼어나게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계속할 수 있을 만한 재능과 적성도 있어야 한다.
그 뿐인가,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사회적 지위도 필요하다. 이유 없이 해고되거나 월급이 깎이지 않을 만한 적당한 안정성도 있어야 한다. 또 가족을 꾸릴 계획이 있다면 일 밖의 삶을 병행하기 위한 제도도 갖춰져 있어야 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서로를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좇다보면, 오히려 하고 싶은 일과 더욱 멀어지게 되기도 한다.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이어서 시작했는데, 이런 풍파 저런 풍파를 겪다보면 하고 싶은 일의 사전적 의미는 쏙 빠진 채 그 함의만 좇게 될 때가 있다. 가령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순수미술이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다 보니 산업디자인을 하고 있다거나, 가고 싶은 길은 영문학 비평가의 길이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보면 다음 학기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강사가 되어 있다거나.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일이 나의 삶과 에너지를 갉아먹어가고 있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일을 사랑했는데, 일은 내게 최소한의 삶의 조건도 가져다주지 않을 때가 있다. 아, 나는 이 일을 짝사랑하고 있었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짝사랑이 있는 게 아니라 일과 사람 사이에도 있구나.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 “네 열정을 따라가”, “청춘이니까 도전해 봐” 같은 말들은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말만 뚝 떼어놓고 보면 세상에 둘도 없을 훌륭한 조언이지만, 이 말을 듣게 될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를 엮어서 생각해보면 결코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일, 열정, 도전이 그 사람의 삶까지 영위시켜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말은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삶과 사회와 함께 존재한다. ‘하고 싶은 일’이란 말도 그러하다. 말 그대로의 사전적 의미와, 이 말이 삶과 사회 속에 녹아있을 때 갖게 되는 함의까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
김미소 /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