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치와 풍습

2019-10-18 (금) 김갑헌/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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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곱다. 빠른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단풍도 이제 곧 사라지겠지. 뉴잉글랜드의 현란한 단풍을 보겠다고 LA에서 찾아온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것은 계절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과 생각도 큰 변화의 흐름에서 예외가 아닌 것을 새삼 스럽게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 그 자체 뿐”이라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는 말했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사람도 바로 그 사람이다. 강이 변하고 발을 담그는 사람도 변하고 그 변화를 표현하는 수단인 우리의 언어도 동시에 변화의 과정속에 있기 때문에, 다시 발을 담근다고 해도 그 강은 전과 같은 강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불변하는 일정한 법칙(Logos)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는 무질서나 혼란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변화라는 인식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광범하게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도가(道家)의 사상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기독교의 가르침도 거의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일점 일획도 변치 아니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꼿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오직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언도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실체(진리)와, 시간과 순간 속에서 빠르게 변화를 거듭하는 현상의 명암을 살핀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변화하는 것들의 중심에 우리 인간이 서 있다. 그 것은 이 자연속에 오직 인간만이 인위적인 변화를 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형성한 문화와 그 문화의 한 열매인 인간의 가치나 풍습이 빠르게 변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변화일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인위적인 변화가 과연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위한 변화냐 하는 점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변화의 하나는 ‘공해’ 문제일 것 이다. 천지가 플래스틱으로 덮여서 ‘신음하는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이 공해가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파괴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보수와 혁신의 갈등이 가져오는 여러 정책과 기치의 문제들이 과연 새로운 질서와 조화라는 큰 틀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세금 면제권을 박탈하겠다”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정신나간 발언이 과연 변화의 큰 틀 속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한 살펴야 할 것이다.

자연의 변화 속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는 조급함이 인위적인 변화의 시작이요, 이 욕구가 문명과 문화를 만들고 재창조한 인간의 위대한 점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을 파괴하고, 지켜온 가치나 풍습들을 정치적인 이기심에 맞도록 시시 때때로 파괴하는 것이 과연 ‘질서와 조화’라는 변화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나무들, 변화하는 온도에 따라 나뭇잎을 아름다운 색깔의 단풍으로 변화시키는 자연의 이치는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것 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인 것 같다. 변화는 결국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김갑헌/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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