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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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혼)이 살아야 ①

2019-10-18 (금) 김광석/ 한미헤리티지소사이어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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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을 전후하여 지난주에 고국에 다녀왔다. 대한사랑(史郞)이라는 민족사학그룹에서 10월2일 역사 광복이라는 주제로 올림픽공원에서 개천 행사를 개최하며 필자를 초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렸을 때에 우리는 배달민족이요, 홍익인간의 큰 사상을 지켜왔다는 것을 들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한국사교과서들에는 배달민족은 전혀 설명되지 아니하였고, 홍익인간은 단군신화로 잠시 소개되고 사라졌기에,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싶었다. 한편 한국인의 얼이 설명되고 이어지는 역사책이 있다면, 이를 미국으로 가져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역사학자들과 역사 활동을 하는 분들을 만나 뵈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크게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첫번째 그룹은 가장 큰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분들인데 대개 학계에 계시는 분들이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분들의 특징은 고대사에 대한 언급을 피하며, 단군은 신화라고 한다. 다른 그룹은 고대사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첫번째 그룹을 강단사학이라고 명명하며 그들은 식민사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민족사학자들이었다. 그리고 제3의 그룹은 민족사학자들의 고대사를 일부 받아들이며 민족사학과 강단사학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기존의 식민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그룹이었다.

한국의 강단사학계가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하지만 민족사학계에서는 전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식민사관은 1925년 총독부 직할기관으로 설립된 조선사편수회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입증하고 조선인의 민족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일본의 사학자, 군부, 정치인 그리고 어용조선인들을 참여시켰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4가지의 방법을 사용했다. 1. 조선인의 뇌리에서 민족의 넋을 말살시키기 위해 단군을 신화로 만드는 것 2. 조선이 고대로부터 중국의 식민지였음을 강조함으로 조선인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 3. 조선의 영토를 반도 내에 가두어 민족의 사고를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고 당쟁과 내분을 강조함으로 민족의 열등감을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 그리고 4. 일본은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쓰여졌고, 시간이 지나며 일본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보강된 것이 식민사관이다.


놀랍게도 해방 후에 식민사관은 고증학파의 고증사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민국의 강단에서 계속해서 교육되어왔고, 따라서 시간이 지날 수록 민족의 혼과 정신은 점차 소멸되어 왔다는 것이다. 고증학파는 유물로 고증되지 아니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일제가 만든 고증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경 이북지역에서 출토된 낙랑의 유적을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조작하여, 낙랑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최근 민족사학자들이 낙랑은 평양이 아니라 요하지방이라는 유적과 문서를 제시하며, 식민사관의 고증방법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중국의 역사왜곡과 일본서기의 황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금년은 단기4,352년이다. 47명의 단군께서 고조선을 통치하신 사실이 있음에도 기존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참으로 해괴한 일들이 본국에서는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해방 후 이병도박사는 1927년 조선사편수위의 촉탁위원으로 임명된 인물로 해방 후에도 이 땅에 식민사관의 흐름을 지속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 낙랑은 요동에 있었다고 회개하셨다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니 아직도 낙랑은 평양에 있다고 그려져 있었다. 고대사를 거론한들 과거의 일인데 무엇 때문에 토론하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고대사가 정립되어야 우리의 정체성이 나타나고, 사상이 정립되기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광석/ 한미헤리티지소사이어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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