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광장의 시간

2019-10-08 (화) 신응남/ 변호사·서울대미주동창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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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아니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조제 사마라구 ( Jose Sama ragu) 의 “눈먼 자의 도시 “ 에 나오는 구절이다. 작가가 전하려는 메세지는 “ 현대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한 윤리의식과 비 도덕적인 행동을 비판 없이 행하며 방관하는 비겁한 무리에 대한 질타” 라고 생각된다.

현대를 사는 인간들은, 물질적 탐욕과 집단이기주의에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윤리와 도덕 그리고 정의를 쉽게 외면하는 눈뜬 장님이기에, 정의의 눈을 뜨고 세상을 직시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처참한 문명 파괴를 목격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는 “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에서 개인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이타적 행동을 하나, 집단을 형성하여 행동할 때에는 집단이기주의에 함몰되어, 비 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고 말했다.

특정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그들만의 연대의식은 정의와 도덕률이 실종된 도시에서도 편파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며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각 진영 시민들을 광장으로 내몰고 있는 현상을 보면, 2,500년전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로의 후퇴와, 군주주의와 제국주의에 항거하며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던 18세기 유럽 식민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플라톤은 국가의 운영을 민주적인 제도에 의해 현자에게 맡겨야 한다면서도, 민주적 제도아래 운영되던 선동 정치의 병폐를 보며, 중우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그의 <국가론>에서 언급했다.

사마라구의 질타 앞에 현대를 살고 있는 지성인으로, 문명의 퇴보를 가져온 작금의 광장정치 행태를 보며, 한없는 무기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분주함과 고단함을 위선의 피신처로 삼고, 때로는 진영집단의 벽 뒤에 숨어 서성이는 우리들의 모습은 끝없는 당혹감과 좌절감을 안겨준다. 한 세기전 시대를 살았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 짜라투스트라” 에서 신의 죽음과 Ubermensch(초인)의 출현을 선언했다.

“인간이 불명예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것, 즉 초인이라 하는 것이고, Ubermensch를 낳는 것이다.”

“위대해지고 싶다면 인간은 위대한 존재로 변신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변신을 가로 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 그 장애물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의 오만이다. “ 오만 때문에 인간은 자신보다 나은 존재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

아마도 집권하고 있는 한국의 현 정권은 주권을 위임한 신민위에 군림하며, 신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바벨탑 공화국 속의 포로가 된 오만한 자가 된 듯하다. 그들에게 짜라트스트라 이야기, Ubermensch를 들려주고 싶다. 위버멘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즉 변신을 의미한다, 눈먼 자의 도시 속에 갇혀 있는, 포로의 상황을 뛰쳐나와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니체보다 백 년을 앞서 산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성은 오직, 그의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견뎌낸 것에 대해서만 가치를 부여한다.” 라고 말했고, 이성이란,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이 우리 마음 속의 빛나는 위대한 도덕률” 이라 했다.
과거로 회귀한 우리들의 광장의 시간은 끝나야 한다. 눈먼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위대한 도덕률을 지켜주는 이성을 관리하며,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의 세계로 한 발을 떼어야 하겠다.

<신응남/ 변호사·서울대미주동창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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