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사람들이 서편제다 동편제다하며 한국여행을 다녀들 왔다. 그런 여행을 못해 본 나는 서편제하면 눈물을 쏟게 했던 영화만 떠오른다. 나하고는 거리가 먼 여자의 창 가락에 왜 내가 그렇게 울었는지. 한국인들에게는 그 ‘한’이라는 정서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가, 아니면 전쟁이 아물지 않은 시기를 겪은 세대라 그런가.
얼마 전 이태리 한 거리에서 ‘JUNGWOOK’이란 글자가 쓰인 자켓을 입은 젊은 여자를 보았다. 저들의 눈에는 우리 Corea가 자신감 넘치는 멋진 젊은이들로 차 있는 잘 나가는 나라로 보여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한’이 많다는 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절감했다.
몇 년을 벼르고 벼르다 가 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당연히 한국관부터 찾았다. 빠징꼬 소설도 읽은 터에, 한국관의 주제 ‘역사가 우리를 망쳤지만, 상관없다’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 잔뜩 기대를 했다. 한국관은 일본관 바로 옆에 있었다. 물론 한국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마음은 정말 복잡하다. 조국이란 단어가 온통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데, 한국은 나의 조국이다. 조국이면서 또한 이국이기도 하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를 시켜야 하는 건지, 내가 몸담고 있는 미국은 그래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 복잡한 마음으로 한국관을 보고난 느낌은 ‘아, 한국은 아직도 한의 나라구나’ 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성국극’이라던가, 왠지 신비스런 존재로만 여기던 무용가 최승희 그리고는 제주 대량학살을 다룬 무당 스토리. 하, 여기 멀리 온 세계 사람들이 놀러오는 베니스, 그 중에서도 최첨단 예술을 보여준다는 비엔날레에서 뼈에 사무친 한국을 볼 줄이야.
무당 아주머니의 처절한 주문 소리와 남장을 한 여자 무용가, 그리고 혼란기에 북으로 간 최승희 이야기에서 오히려 역사에 치이고 치인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역사가 우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실은 그 역사를 치고 일어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것일 텐데도 내 눈에 한스럽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일본관은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별말이 없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깔끔한 모습, 차갑고 너무 냉정해서 그래서 더 뭐라고 나무랄 수 없도록 바닷가에 놓인 커다란 바위 하나, 화면 끄트머리에서 보일 듯 말듯 움직이는 물결…. 뚫어지게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일본 작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온 몸짓과 온갖 소리와 자료를 들이대며 말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과 참 달랐다.
그러고 보니, 미국 땅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 동생들이 맡아 돌보고 있는 노모 때문만이 아니라, 차곡차곡 정리시킬 수 없는 이 마음. 이 자체가 하나의 ‘한’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노려 웨체스터 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