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더 이상 시간이 없다

2019-09-18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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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는 국도를 사방팔방으로 확장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취하려고 했다. 그중 가장 탐스럽게 생각한 것이 노예였다. 로마는 이들을 데려다 부리면서 자유민과 노예, 정복자와 피정복자 두 신분으로 갈라 전쟁을 치르면서 지중해 전역의 모든 나라를 정복했다. 로마의 귀족이나 고관들은 노예의 희생으로 자유의 생활을 맘껏 즐기면서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랬다. 동물과 싸우도록 하여 노예가 피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흥겨움을 취하기도 했다.

노예도 같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소중한 자식이다. 같은 하늘 밑에서 다른 인간과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다 결국은 다 같이 죽어가는 동등한 인간이다. 하지만 눈썹위에 한번 낙인이 찍히면 영원히 주인에게 예속되어 온갖 억압을 당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한다. 로마군에게 정복된 지역의 시민들은 울면서 불길에 몸을 던지거나 성벽에서 뛰어 내리고 스스로 아버지의 칼 앞에 가슴을 내밀고 죽기를 각오했다. 평생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예들의 처절한 운명은 대대손손 물려지면서 노예가족은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가 갈라져 평생 핏줄을 그리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노예는 모두 주인의 재산이자 도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박탈된 노예의 평생 비극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1863년 미국의 제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발표한 노예해방선언문이 온 세계에 발표되면서였다. 당시 일어난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자 북부에 계속 저항하는 남부지역의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이후 현대에 와서는 노예들에 관한 인권박탈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국제사회가 1948년 유엔 인권선언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존엄과 가치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이런 기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인 수령 독재 체재하에 억압돼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는 이유이다.

유엔 북한인권 보고서도 북한 정부가 집단 학살과 살인, 노예화, 고문, 구금, 강간 및 기타 형태의 성폭행, 강제 낙태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노예처럼 사슬에 묶여 살지는 않더라도 현대판 노예제도의 끝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한 동족사이에 빚어진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눈물짓고 가슴을 치는 우리의 이웃이 있다. 멀쩡한 가족을 눈앞에 두고도 70년이 되도록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못 전하는 남북한 이산가족들이다. 살아생전 이제나저제나 만날 수 있을까 애타게 기다리며 눈물짓는 부모 자식, 형제 자매들. 그들은 핏줄을 그리며 오늘도 내일도 눈물로 생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이산가족들은 그간 이뤄진 20여회 금강산 면회실에서 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부러움과 감격의 기쁨과 회환의 눈물을 흘렸다.

피난길에 잠시 외출했던 돌아오겠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가 고령이 되고 갓난 아이였던 아들이 7순이 되었으며 꽃다운 나이에 헤어진 누나가 팔순의 할머니가 되는 등… 모두가 자신들의 처절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분단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평생 눈물로 살아온 이들, 더 이상 과거의 잘못을 끌지 말고 이제는 원상태로 돌려야 한다. 바로 이산가족 상봉이다.

인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정부는 뻔히 눈앞에 두고도 살아있는 혈육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산가족의 한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노예와 다름없는 형벌이다.

북한도 정말 비핵화를 원한다면 우선 인간의 기본인 혈육부터 만나게 하는 것이 순리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이달 말에 있을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 의제로 재미 북한 이산가족상봉을 내놓는다는 소식이다.

현재 재미 북한 이산가족은 1,000여명으로 빠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는 상봉 희망자 명단 105명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들이 죽기전에 소원인 가족상봉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산의 아픔,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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