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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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2019-09-17 (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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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고 공기는 서늘하다. 아침과 저녁에는 쌀쌀함이 느껴진다. 찬 바람이 부니 마음까지 설레인다. 여름지나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어느덧 가을이 짙어지고 있다.

가을의 수식어는 대부분 상투적이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란 표현이 그렇다. 사색의 계절, 고독한 계절, 외로운 남성의 계절, 추수의 계절 등도 그러하다. 아마도 정말 식상한 표현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닐까 싶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자연으로서는 긴 여름의 괴로운 더위를 지나 맑은 기운과 서늘한 바람이 비롯되는 때요, 사람의 일으로서는 자연의 그것을 따라 여름 동안 땀 흘려가며 헐떡이던 정신과 육체가 기쁘고 피곤한 것을 거두고, 조금 편안하고 새로운 지경으로 돌아서게 되는 까닭이다”-만해 한용운 독서삼매경.


책 읽는데 좋은 계절이 따로 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을이 오면 독서의 계절을 떠올린다. 읽어야 한다는 일말의 부담감과 강박감에 의한 자성일게다. 이런저런 핑계로 책 한 권 안 읽고 넘어간 여름날에 대한 뉘우침과 한탄, 그런 회한이 매해 되풀이 되다 보니 독서는 가을에 해야 하는 것인 줄로 여길 수도 있다. 어차피 여름에 읽지 못했다면 가을에라도 읽으면 좋지 않겠는가? 여하튼 가을은 책 읽기에 좋은 계절임은 틀림없다.

어려서부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듣고 자랐다. 언제부터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국의 농경문화의 관습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농사를 짓는 봄과 여름에 비해 농사 비수기에 들어가는 가을이 독서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한 해 농사를 마쳐 먹을거리가 풍성한 가을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가을의 넉넉함 덕분에 마음을 살 찌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독서의 계절로 자리매김했다는 얘기다. 흔히 가을에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쓰이는 사자성어인 등화가친(燈火可親)은 그런 관습을 담은 대표적 사례라는 설명이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은 등불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을밤은 시원하고 상쾌하므로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좋은 시기라는 의미다. 이 말은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한유가 18세 된 자신의 아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지은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에 나온다. 내용 중에 끝부분은 이렇다. “시추적우제(時秋積雨霽)때는 가을이 되어 긴 비도 마침내 개이고 신량입교허(新凉入郊墟) 서늘한 바람이 마을에 가득하구나. 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 이제 등불을 점점 가까이 할 수 있으니 간편가서권(簡編可舒卷) 책을 한번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한유는 이 시에서 어렸을 때 비슷비슷하던 아이가 나중에 한명은 말을 모는 쫄개가 되고 한명은 재상이 되는 것, 누구는 군자가 되고 누구는 소인이 되는 것은 글을 읽고 익히는 데 달렸다고 강조한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했다. 인생에서 배우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독서는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한유가 아들에게 독서를 당부한 이유다.

책을 가까이 하기에 좋고 생각이 깊어지는 가을에 왜 책을 읽어야 할까? 독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책은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진정 내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독서는 필수다. 독서는 생각과 마음의 양식을 채워준다.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 삶을 변화시킨다. 독서의 진정한 힘은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을 키워주는 데 있는 것이다.

흔히 낯선 타국에서 이민의 삶을 살아가다보면 독서의 빈곤에 빠지기 쉽다. 가을에 책을 읽으려 해도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독서를 즐기며 살기에는 삶이 너무 팍팍하다. 가을뿐 아니라 1년 내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 가을에는 독서를 해보자. 그런 팍팍한 이민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책속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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