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통신] 가을 누림
2019-09-05 (목)
진월 스님 / 고성선원장
요즈음 이곳 산위에는 한밤중에 청신한 풀벌레 노래는 물론, 참나무에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이따금 들립니다. 구월이 되고, 가을이 영글어가는 즈음에, 무더위를 벗어난 기쁨과 시원한 바람을 맞는 설렘이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고국에서는 음력 팔월보름의 한가위 연휴(9/12-15)를 내다보면서, 이곳 11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과는 결이 다른 동네잔치 기분으로 배달겨레의 오랜 전통을 되새기고 즐기는 분위기입니다. 이곳에서는 며칠 전에 노동절(Labor Day)을 지내며 일반인들은 여름철을 마감하고, 학생들은 새 학기 개교의 기쁨과 신선한 의욕으로서 다정한 활기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달 셋째주말(9/21)에는 불자들의 피크닉 파티가 야단법석처럼 실리콘벨리 센트럴파크에서 벌어지며, 넷째주말(9/28)에는 “한국의 날” 행사가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좋은 시절, 동포사회에 우정을 나누고 친목을 돋우는 즐거운 잔치들이 이어져 펼쳐지니, ‘이 아니 즐기리오!’ 주중에 열심히 일하며 공부하고는 주말에 ‘레크리에이션’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들음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필요하고 바람직한 살림살이 방법일 줄 압니다.
근래 우리사회에서는 새로운 용어와 생활방식이 유행입니다. 이곳 실리콘벨리에 펼쳐지고 있는 첨단 과학기술 문명의 한 상징으로서, 빠른 속도와 쉬운 편리를 보이는 “디지털” 성향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제4차산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손안에 들어오는 “스마트폰”에서 대부분의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좁혀서 “지구촌” 친구들과 다방면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책을 구해보기보다 포털 검색으로 글이나 각종 음악도 마음대로 찾아 읽고 들을 수 있는 실정이며, 상점이나 은행에 가지 않고도 물품의 구입이나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멀리 있는 지인 친구들과 수시로 쉽게 연락하고 소통할 수 있으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필요를 별로 느끼지도 않고, 혼자서도 게임 등을 즐기며 인간관계의 번잡함을 피하는 경향이 짙어져 갑니다. 누구나 어떻게든 많이 갖고 빨리 편하게 살려는 데에 생각이 머물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좀 적게 갖고 천천히 약간 불편해 보이지만, 조촐함에 여유를 누리는 바, 전통적 “아날로그” 식 생각과 살림살이는 구시대적 또는 후진 방식으로 치부되고, 벗어나거나 떨쳐버려야 할 것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먼 거리가 아닌 곳도 걷기보다 차를 타고 이동하기를 좋아하며, 천천히 스스로 밥을 지어먹기보다 만들어져 있는 음식을 쉽게 사서 먹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종이로 된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산책이나 운동 또는 노동 등 몸소 하면 보람이 있을 일들도 귀찮게 여기며, 남들이 요리했거나 보여주는 소식들을 전자시설 등을 통해 쉽게 받아드리며 깊이 생각하기를 피하고, 유행을 따르려 애쓰며 매사에 안일한 대처를 일삼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이른바 아날로그식 살림에 향수를 느끼며, 느리고 단순하게 살아감이 보다 편하게 됨은 스스로 늙어가는 자연의 섭리인 줄 압니다. 산중에서 호젓하게 천천히 많이 걷고, 되도록 적게 먹으며, 세상 다툼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으면서, 옛 성현의 살림살이를 음미하고 공감하며 나름대로 누려보는 여유의 가을을 맞고 싶군요. 도반님들도 가끔 조용히 홀로 앉아 독서와 명상의 시간도 갖고, 동양과 서양 정신을 아우르며, 전통과 현대 및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명, 로컬과 글로벌 문화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하여, 조화와 균형 있게, 이 찬란한 가을을 시원하고 알차게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성에서, 진월 두손모음
<진월 스님 / 고성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