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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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의 시계

2019-09-03 (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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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무더웠던 여름. 불볕더위와 폭염에 시달렸던 날들.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고 고생한 나날. 그런 하루하루가 너무도 많았던 8월. 연일 폭염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하루빨리 떠나가고 사라져가기를 바랬다. 그런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8월도 이제 지났다.

시간의 흐름은 무섭다. 더위가 막바지로 물러가고 벌써 가을을 알리는 9월이다. 9월이면 뭔가 옅은 갈색 빛이 감돈다. 바람에 실려오는 가을 향기도 가득 퍼진다. 하늘은 하루하루 쑥쑥 위로 자라는 것같다. 높은 하늘 색도 점점 또렷해진다. 절기 입추가 지나도 끄떡없던 더위도 9월이 시작되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난다. 한낮 기온은 아직도 화씨 80도 안팎이지만 여름의 더위하고는 사뭇다르다. 아침에는 신선한 공기가 섞여 있어 선선하다.

낮의 햇살도 참을만 하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도 잦다. 이처럼 9월은 가을 느낌을 더해준다. 하지만 9월초에는 석달정도 머물던 여름이 아직은 남아있다.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이 공존한다. 그래도 9월은 여름보다 가을에 가깝다. 흔히 가을의 시작을 9월달로 인식하는 이유다. 대게들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을 가을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9월은 가을이 다가옴을 알린다. 맑은 공기, 탁 트인 시야, 유난히 푸른하늘 등이 그 역할이다. 흔히 사람들은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9월의 시작. 이제 지는 해가 빨라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정원에는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가을 꽃들이 서둘러 피어나고 있다. 동네 가든에는 크고작은 들국화 화분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면 풀벌레들이 울어대기 시작한다. 이처럼 초가을은 다양한 느낌과 향기로 우리 가슴을 파고 든다.

엊그제 뉴저지로 이사간 지인의 집에 갔다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가을의 전령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가운데서 또렷한 귀뚜라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밤이 찾아올 때 들린 그 소리는 아름답고 운치 있어서 가을밤은 낭만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귀뚜라미 소리에, 그의 정체도 궁금해 졌다.

귀뚜라미는 날개가 2쌍, 다리가 3쌍이다. 소리를 내는 날개는 앞날개. 그 앞날개의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는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왼쪽 날개는 겉으로 포개져 있다. 이 곳에 마찰기관이 있다. 오른쪽 날개는 속으로 속으로 포개져 있고 굵은 줄이 있다. 이 두 날개를 서로 비비면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귀가 무척 예민한 귀뚜라미는 머리에 귀가 달려 있지 않고 앞다리 종아리 마디에 있다. 야생의 귀뚜라미는 서로 모여 산다. 습기가 있고 먹이가 풍부한 곳에 주로 서식한다. 귀뚜라미는 불완전 변태를 한다. 땅 속에 알을 낳고 알에서 애벌레가 나오는데 이 애벌레가 자라서 껍질을 벗고 성인 귀뚜라미가 되어 나온다. 성인 귀뚜라미는 늦가을까지 짝짓기를 하고 일생을 마친다고 한다. 울음소리는 수컷들만 낼 수 있다. 이 것은 암컷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다른 수컷들에게 자기의 영역을 알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가을을 알리는 울음 소리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짝을 찾는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귀뚜라미는 묘한 재주를 갖고 있다. 귀뚜라미는 화씨 75도를 전후해 가장 왕성한 짝짓기를 할 때 울음 소리가 가장 크다. 주변의 온도를 파악해서 울음소리를 조절하는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돌베어 법칙에 의하면 귀뚜라미가 14초 동안 우는 횟수에 40을 더하면 화씨온도가 나온다. 14초 동안 귀뚜라미가 35회 울었다면 화씨온도가 75도가 되는 셈이다. 이런 연휴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예로부터 귀뚜라미 소리를 바탕으로 주변 온도를 알아냈다. 그래서 “귀뚜라미는 가난한 사람의 시계’라는 미국 속담도 생긴듯 하다. 물론, 귀뚜라미의 종에 따라 기준이 되는 시간은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요즘들어 가난한 사람의 시계로 불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밤이 찾아올 때마다 나즈막히 들려온다. 어느 덧 가을의 전령사가 우리 곁에 찾아왔다. 아, 또 가을인가 보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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