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만들 땐 연꽃을 심자, 였는데, 그로 인하여, 이끼, 개구리, 뱀...없던 여러 생명들이 나타났다. 때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 소우주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 중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존재,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사라지는 것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들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세상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수긍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실재한다고 여겨서, 모든 것에 착을 내고, 그 실재의 본질이 공함을 인지 못한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특히 애착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 ‘애별이고’, 애착가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구부득고’에 고통 받는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진다. ‘성주괴공’ 이요, ‘생주이멸’ 이다. 머물다가 사라진다. 실은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사라진 게 아니며, 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살다가, 혹은 있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싫다고 해서 이 법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본질을 바로 보고, 그런 것임을 알아, 내 마음을 바꿀 수는 있다. 혹자는 또 마음타령, 하시겠지만, 마음 타령을 안 할 수가 없다. 마음을 먼저 알아야 고치든, 할 거 아닌가.
도구를 잘 알아야 잘 쓴다. 마음 역시 도구다. 그 도구가 당신을 움직이므로 알아야 한다. 이 부분이 참 어려운데,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을 비롯하여,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가령, 바다는 실재하나, 바다의 실체는 없다. 눈에 보이는 푸르고 깊고 파도치고 하는 게 바다, 라고 여기지만, 바다는 파도고 물이고 소금이고...분자, 원자고, 바다, 라는 이름일 뿐, 그 실체는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그저 점, 이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 단위들의 모임이다. 사람을 구성하는 주된 점, 은 산소, 수소, 탄소이다. 그 점들이 인연시절에 따라 모이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점묘화처럼, ‘일즉일체’ 이다. 무엇, 인 거처럼 보이나 실은 공한 것이다. 문자로 그렇단 게 아니라, 실지로 전자와 원자 사이는 텅 비어있다. 물리학이 현재 이 지점에 도달하였다. 그걸 증명해주어 그들이 너무 감사하다. 스님이 백번 말해도 안 믿다가 과학으로 증명했다면 다 믿으니까. 지구도 우주도 당신도 그렇게 있다. 알아도 안보이던 이 사실이 깨치면 보인다. 그걸 깨달아 볼 수 있다면, 당신의 삶은 달라진다. 걸림없음을 알고, 자유로움을 알게 되며, 매사에 긍정적이 될 수 있다. 행복하지 않겠는가! 깨달았다고 해서 이 아무개가 박 아무개가 되는 건 아니다. 이 아무개가 처한 세상이 확 달라지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세상은 누가 만든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이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세상이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다고, 거꾸로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전도몽상’이다. 이런 세상을 그냥은 벗어날 수가 없다. 수행이 필요하다. 아는 것으론 안된다. 이 중은 하면 할수록, 과학이 발전할수록, 부처님 법밖에 할 게 없다는 걸, 매순간 깨닫는다. 이 법을 몰라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 딱하고, 하루라도 빨리 깨달았음 싶다. 그런데, 평소 절에 오는 이들을 보면, 공부는 늘 뒷전이다. 절은 불법을 펴는 수행 공간이다. 수행하러 오고, 공부하다 막히면, 인터넷에서도 못 얻으면, 그걸 물으러 오라. 놀아달라고 오지 마시라. 당신들 편한대로 정한, 당신들 마음에 드는, ‘그런 스님’ 은 이곳에 실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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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스님 /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