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침의 긴 편지

2019-08-16 (금) 김갑헌/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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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이른 아침, 카톡 소리에 눈을 떴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속한 해군-해병 전우회에서 온 것 이었다.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에 복무한 해군제독에서부터 해병대 사병으로 복무한 모든 동창생들을 포함한 모임이다.

회원 몇 분이 현 정부의 국방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이 카톡방에 올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로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젊은 후배들로 생각되는 분들의 불평이 카톡방에 올라오더니 곧 줄줄이 이 전우회를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치적인 이견은 선후배 형님, 동생의 끈끈한 사이도 이렇게 쉽게 갈라놓는 것 같다.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가 가져오는 사회적 충격의 작은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의견이 다르면 서로 등을 돌리고 살아야 하는가? 민주주의의 장점은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이 어울려 이루는 조화와 질서인데, 미국도 한국도 이런 민주주의 기본적인 성격을 아주 무시하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트럼프가 하는 일은 모두 나쁘고, 문재인 정부가 하는 모든 일들은 과연 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인가?


지난주 어느날 하루 뉴욕타임즈는 20여개에 이르는 트럼프 비판 기사를 썼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 된다면 그 수훈은 바로 뉴욕타임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인가?

힘든 일인 것 같다. 역사를 읽고 돌아보아도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바꾸거나 이념을 넘어서서 더 큰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인 목표를 추구한 예가 많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후의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면 공산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김일성, 이를 배격하고 자유 민주주의 만이 살 길이라고 믿던 이승만, 이 두 극단의 입장을 민족의 통일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타협해야 한다던 김구의 이상을 쓰레기 대하듯 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댓가를 치루었는지 이제는 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자기의 입장만 옳고 다른 사람의 것은 파괴하고 없애야만 모두 원하는 진정한 평화와 잘 사는 사회가 도래해는 것 일까?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한국인의 분열적인 태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이다. 이념의 편향에 따라 극단적인 입장만 존재하지 그 중간, 협상과 타협을 통해 당면한 난국을 헤쳐가려는 지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그 역사를 반복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가 난국에 처했을 때 단 한 번도 지도자와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그 난국을 태개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임진왜란이 닥쳐오는 총체적인 난국에서도 당을 갈라 자기 당파의 이익만 추구하던 역사의 비극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지금이라도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정치적인 이념이나 의견들 때문에 멀어졌던 ‘관계’의 끈을 다시 찾아내어 화해와 양보와 관용의 미덕으로 상처받은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일찌기 해방의 감격을 노래했던 정인보 선생의 글 한 줄이 생각난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던 님들의 경고를 광복절을 맞는 오늘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정치적인 이견, 이념의 편향으로 멀어졌던 친구 친지들에게 긴 화해의 편지를 쓰는 이 아침이 되기를 빈다.

<김갑헌/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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