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밤 새기 전 한시간

2019-08-14 (수) 김해종/목사·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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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새기 전 한 시간이 가장 어둡다. 이 진리를, 해방 기념일, 광복절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우리 나라의 광복절은, 빛이 돌아 온 날, 그 긴 밤이 새던 날이다.

필자는 한국 대통령이 탄핵 되고 감옥에 갇히며 나라의 혼란이 걱정되어 한국에 계시는 존경하는 장로님께 전화 했다. “장로님 우리나라,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장로님은 한마디로 대답 했다. “감독님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은 ‘오뚜기’ 아닙니까?

쓰러지면 다시 일어 나는 '오뚜기' 광복절은 오뚜기 날이다.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되어, 다시 일어 섰다. 빛이 돌아 왔을 뿐 아니라, 2년 만에 참된 애국 지도자들에 의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빛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설립됐다. 그러나 어두움은 다시 찾아 왔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 같은, 두살쟁이 나라에 6.25 전쟁이라는, 우리 역사에 없는 비참한 전쟁이, 김일성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독재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3년에 걸쳐 3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가고, 한반도를 초토화 시킨 정쟁. 오뚜기는 또 쓰러졌다. 그 전쟁을 경험한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어둡고 어두운 날들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기억한다.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자유가 없는 압제의 통치와, 인민 재판과 숙청의 횡포. 총탄과 포탄과 폭탄의 공포 속의 어두움…삼개월 후, 서울은 수복 되었으나 나에겐 아버지를 잃는, 개인적인 밤이 시작 되었다. 설상가상, 그로부터, 3개월만에 또 1.4 후퇴라는 재난이 왔다.

1951년 1월4일은 한강이 꽁꽁 얼만큼 몹시 추웠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길을, 손수레 하나 끌고, 동생들 태우고, 홀로 된 어머님 모시고, 다리가 폭파 되어 없는 한강을, 얼음 위로 건넜다. 사흘길 걸어, 낯선 농촌에 도착, 집밖에 있는 마루에 볏짚 위에서 떨면서 밤을 지나고 나니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나는 중공군에게 끌려가 수원 쪽으로 후퇴하는 그들 위해 길을 인도하라고 강요 당했다. 다행히, 어머니가 뒤쫓아와 “우리 아들은 벙어리고, 우리는 피난민이라 길을 모릅니다” 고 빌어 그 위기를 모면했다. 나는 당시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두운 밤이 가고 날이 새는 시간, 동네 옆을 지나는 국도, 고갯길에서 탱크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군들이 진격해 온 것이다. 온 동리와 피난민들은 뛰어 나가 환영 했고 유일하게 영어를 좀 하는 내가 한 미군 장교에게 “중공군은 어제 밤 수원 쪽으로 이동했다” 고 일러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게 되고, 미군 군목 통역도 되고, 목사가 되었으니 그날은 나에게 빛이 돌아온 날, 광복일이라 할까? 6.25의 긴 밤이 가고, 오뚜기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섰다. 한강의 기적이 왔다.

한 역사가는, 역사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남겼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끄시고, 역사에는 “Give and Take” (주고 받는 것, 얻고 잃는 것 , 망하고 흥하는 것) 가 있고, 밤은 새기 전 한 시간이 가장 어둡고, 정의의 바퀴는 굴러가고 있으나 서서히 가고 있다고.
개인의 생이나, 한 국가나 인류의 역사에서, 밤이 올 때, 새기 전 한 시간이 가장 어둡다는 교훈을 기억 하기를 광복절에 다시 생각해본다.

<김해종/목사·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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