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방

2019-08-12 (월) 최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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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조국이 일제(日帝)의 올무에서 해방되던 날인 1945년 8월 15일, 이미 사범학교 2학년생이었으니 그 날의 감격을 똑똑히 기억한다. 모든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목이 터지게 만세를 외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해방(解放)이란 한자는 풀려나 놓인다는 뜻인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强占)하고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모든 일을 일본인 우선으로 하였고, 조선의 해방운동을 하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다. 실로 모든 조선인을 노예로 삼았던 암흑의 세월이 일본 통치시대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조지 헨드리 교수는 날로 늘어나는 청년 자살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청년들이여, 저항(抵抗)을 감수하라.” 자살은 살 의지가 상실된 것인데 사실 살 의지란 저항이 주는 자극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은 피할 것이 아니라 감수해야 한다. 저항이 자극을, 낳고 소망이 행복을 낳는다. 사실 순탄하게 보이는 부부 사이에 문제가 곪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깊이는 많은 저항을 뚫고 이룩된다.

희망은 고통 속에서 움튼다. 아름다운 꽃 에델바이스는 봄이 오기 전에 차가운 눈 속에서 이미 꽃을 피운다. 바다의 조수는 아마도 지구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들어오고 또 나간다. 조수가 물러간 자국은 지저분하다. 그러나 한 때의 지국만으로 낙심할 건 없다. 조수는 다시 밀려와 만조(滿潮)가 될 것이며 아름다운 물결이 어느 날의 수심을 잊게 해 줄 것이다. 감정이 조수에 끌려 다니는 것보다 조수의 변화를 조용히 기다리며 희망 속에 오늘이란 시간을 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롭다.


신생국가 아메리카의 발전상을 관찰하여 늙어가는 유럽의 나라들을 깨우치고자 당대 최고의 철학자 프랑스의 토케빌레(Alexis Tocqueville)교수가 100년 전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보고서는 미국의 정치 상황이 아니라 당시 미국교회의 강단(설교)을 주목하고 있었다. “미국교회 설교자들은 선(Goodness)과 정의(Righteousness)와 인간해방(Liberation)을 외치고 있었다. 과연 이 새 나라는 희망이 있다.” 한국교회의 설교 메시지는 반성할 점이 없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얀마의 수키 여사는 거의 평생을 가택에 연금된 생활을 하였는데 기자 회견이 허락된 날 첫 마디가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인권 자유와 모든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울부라이트 전 국무장관도 ‘퍼레이드’지와의 인터뷰에서 “평화 수립이란 곧 인간의 해방을 가리킨다.“고 단언하였다.

폭풍이 닥쳐 올 때 닭은 자신의 날개 속에 얼굴을 파묻지만,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그 바람을 타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모든 고통과 어려운 문제로부터 해방 되려면 바깥에서 묘수(妙手)를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자체와의 용감한 투쟁 속에 길이 있는 것이다. ‘아플 때는 잘 앓아야 한다’는 말처럼 고통을 지긋이 씹는 인내의 맛울 터득할 때 비로소 고통이 극복된다. 요즘 사람들은 기다리는 맛을 모르는데 괴로울 때면 기다리는 예술을 배울 때이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갔을 때 어둡다고 기차에서 내리지는 않는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밝은 세계가 다시 오기 마련이다.

성경에 이런 멋진 말이 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 고통은 인내력을 키우고, 인내는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키며, 그렇게 단련을 쌓아야 앞을 환하게 내다볼 수 있는 소망이 생긴다는 뜻이다.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최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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