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와 외갓집
2019-08-06 (화) 07:30:51
윤영순 우드스톡, MD
모처럼 저녁나들이 삼아 산책을 나섰다. 지나다니는 길 위에 여기저기 어지럽게 검은 얼룩이 번져있어 올려다보니, 휘어진 뽕나무 가지에 촘촘히 열매가 익어 떨어지고 있다. “어머, 여기에 뽕나무가 있었네.” 이 동네에서 뽕나무 한 그루 발견한 것에 이토록 놀랐다니. 이사 오기 전 동네 친구가 혈안이 되어 찾던 뽕나무인데, 오디 맛 과 잎사귀의 효능을 익히 알기에 눈도장을 찍어 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맘 때쯤 뽕나무에는 오디 열매가 열리는 시기이다.
오늘은 작심하고 아침 일찍 뽕나무 밑에서 먹을 만큼만 잘 익은 오디를 한웅큼 땄다. 언젠가 밤나무 그늘 아래에서 밤을 줍던 생각이 들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세상살이 별 것 아닌 것이, 이런 조그마한 행동에도 살맛나는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뽕나무를 보고 돌아오니 문득 머리속에 한 점 그림이 떠오른다.
어릴 적 밀양의 외갓집에 놀러 가면 아득한 기억 속에서나마 시야에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이 있었다. 또 초여름 장마철에 징검다리는 불어난 개울물에 있다가도 금방 없어지곤 하는 덤성덤성 놓여있는 돌다리였다.
이 개울을 건너 넓은 목화밭에 이르면 눈처럼 희고 순박한 환상의 목화꽃들이 만발하여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만 실눈이 되어버린다.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뽕나무와 목화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청정식물이다. 뽕나무의 잎과 오디는 우리의 건강식이지만 푸른 잎사귀는 누에의 요긴한 먹이이다. 목화 역시 열매와 씨, 그리고 솜에 이르기까지 누에고치를 치는 농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작물인데도 변해가는 세월 탓에 지금은 구경하기조차 쉽지 않다.
비틀비틀 자갈투성이 시골 가로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지나가던 낯모르는 할아버지가 도시에서 온 우리를 안쓰러운 듯 소달구지에 태워 풀숲이 우거진 외갓집까지 데려다 준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외갓집 사립문에 들어서면 꽃밭에는 도라지, 채송화, 맨드라미, 꽈리, 해바라기 등 공기 좋은 환경 속에서 활짝 핀 예쁜 꽃들이 정겹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방 한켠에는 명주실을 뽑고 엮는 물레도 외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노래 가사 ‘청실 홍실’은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꿈을 엮지만, 외할머니의 굽은 등, 고단한 삶은 한올 한올 짜여지는 비단결 속에 외할머니의 회한도 함께 엮어졌으리라.
오늘 우리 동네에서 우연히 뽕나무 한 그루와 마주 친 것이 이다지도 귀한 선물인양 아득하게 퇴색되어가는 기억 속의 외갓집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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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