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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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상대가 “됐다” 할 때까지

2019-08-02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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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7일 일요일 오전8시경, 하와이의 오아후섬 상공은 돌연 일본의 군용기들로 뒤덮였다. 약 200대의 대규모 항공기 편대가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2,400여명의 미국 해군, 육군, 해병대 병사들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튿날 분노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치욕 속에 기억될 날’이라고 했고 미국 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최근, 한일관계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를 월스트릿 저널은 강하게 비판하며 마치 ‘진주만 공습같다’고 했다. 1941년 미국이 일본에 석유수출 금지를 하자 이를 전쟁행위로 간주한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말기 필리핀 전선의 한 일본군 하사관 오가와 데쓰로의 기록(리더스 다이제스트)이 있다.


“4시경 나는 만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서있었다. 거대한 함대가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섬뜩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돌연 짙은 구름이 선단을 덮기 시작했다. 대공포화의 연기 속으로 반점 같은 것 몇 개가 하늘의 이 구석 저 구석으로부터 연기구름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갔다. ‘가마가제 공격이다.’ 까만 반점이 연기 속에서 날아들었고 뒤이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공격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나는 자문하였다. 저 큰 함대 속에서 배 몇 척을 격침시키는 것이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

일본은 이 전쟁을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1945년 8월15일 끝냈다. 자유무역주의자처럼 보이던 아베 신조 총리는 왜 갑자기 막무가내로 폭주하는 ‘가미가제’가 되었을까.

내년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기어코 헌법 개정을 이뤄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실현시키려는가, 아니면 일본의 사라진 20년에 비해 한국의 발전에 배가 아픈 것인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식민지 문제 다 끝났고, 위안부문제 사과했고 배상했다, 징용문제도 모두 해결되었는데 왜 이리 피곤하게 구느냐고도 한다. 아베 총리의 망언과 망동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최근의 그에게는 군국주의 유전자가 발동한 것같다.

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는 동학농민군과 조선조정이 전주화약을 체결하자 1894년 일본군 8,000명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 고종을 인질로 군대주둔 명분을 세우려했다. 또 관동도독으로 안중근 의사를 사형대에 세운 인물이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히데키 내각 상공부장관으로 태평양전쟁 수행의 제일선에 섰고 패전후 A급전범용의자였다. 3년의 형을 살고 1948년 불기소 석방된 후 정계에 진출, 1957년 총리가 되어 잘 살다가 90세에 죽었다. 이들은 역사적 죄를 짓고도 응징받지 않았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끼는 2015년 교토(共同)통신(4월17일자) 인터뷰에서 (일본)은 상대방 국가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과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세한 사실은 어쨌든 (일본이) 타국을 침략했다는 큰 줄기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일본과 한중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 이런 말도 했다.

“일본이 경제대국이고 한국과 중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대에는 그 관계 안에서 여러 문제가 억눌려져 왔지만 한국, 중국의 국력이 상승해 그 구조가 무너지면서 봉인됐던 문제들이 분출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힘이 저하된 일본은 그런 전개(한국과 중국의 부상)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3국관계)가 진정될 때까지 상당한 파란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람이든 국가이든 상대방이나 상대국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원망과 미움, 배신에 대한 노여움이 물처럼 녹아내릴 때까지. 그런 후에야 둘 사이에 새로이 관계가 진전될 수 있다. 당신은 충분히 사과를 했는가! 뭘 잘못했는지 알기는 하는가!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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