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리아의 사랑’

2019-07-25 (목) 김창만 목사·AG뉴욕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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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칼럼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위대한 사랑은 불과 몇 분 사이에 이루어진 낭비적 행동이었다. 가롯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조로 비난하였다. 만약 유다의 말대로 했으면, 마리아의 아름다운 행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복음서는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상실했을 것이다. 복음의 정신은 유다의 신중한 전략에 잇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낭비적 사랑의 행위 안에 있다. 신앙이라는 모험 안에는 상식이나 신중함 등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 안에는 이처럼 어리둥절할 만큼 큰 낭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존 달림풀의 “단순한 기도” 중에서
- ‘사랑’이란 단어처럼 인류에게 널리 회자되는 언어는 없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을 알고 사랑의 실천자로 살아 간 사람은 흔치 않다. 마리아는 사랑의 본질을 안 여인이었다.
마리아의 사랑의 행위는 앞과 뒤를 면밀히 따져보고 셈을 헤아려 본 후에 이루어진 산술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을바람이 낙엽을 휩쓸고 지나가듯,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순수직관의 헌신행위였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가롯 유다는, 고귀한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단번에 낭비하였느냐고 마리아를 힐난헸다. 만일 마리아가 유다의 말대로 했더라면 복음서는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 하나를 잃어버릴 뻔 했다.
가롯 유다처럼 이해타산을 신중하게 따지며 머뭇거리는 사랑은 언제나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 낭비를 주저하지 않는 사랑은 원자탄 보다 강하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는 시인도 있었다.

<김창만 목사·AG뉴욕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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