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할 수 있어도 결코 잊지는 못한다’는 말은 비단 개인간 잘잘못이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국가 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일본이란 나라는 ‘섬의 나라’라 바다 건너 외부로 팽창하려는 원초적 욕구가 있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러기에 일본의 국력이 왕성해질 때나 상대적으로 인근 국가들의 힘이 약할 때, 이웃국가들을 범접하려는 경향이 있음은 자명하다 하겠다.
작금의 한일관계는 참으로 살얼음판 걷는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싸움할 때, 현명하여 타협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 쪽 다 그렇지 못하고 평행선만 달릴 때는 사태발전을 예측할 수 없다. 이때 중재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번 사태의 근본에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가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36년간 국토가 유린당할 대로 당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을 문명화시켰다고 궤변 한다. 물론 정신 나간 일부 한국학자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여성들이 일본군들의 성노리개로 되돌릴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강제 노역과 학대, 죽임을 당한 젊은이들의 인생은 또 어떠한가? 살아있으되 죽은 목숨이란 것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떠한 사과, 그 어떤 보상인들 한국의 여인들과 젊은 강제 징용노동자들이 당한 수치와 파멸된 삶을 상쇄할 수 있을까.
미흡하나 그래도 한일관계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두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일본은 국제기구를 통해 식민통치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하고 한국정부는 이를 꼭 달성시켜야 한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와 한국여성들에 대한 성노예화, 강제징용 노동착취와 학대 등을 그럴 듯한 논리로 정당화하려는 억지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아니 된다.
두 번째, 재정적 보상 문제는 더 이상 일본에 요구하지 말고 우리가 정신적으로 그들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1965년 한일 청구권문제로 일괄 타결됐다느니 어쩌니 하는 일본의 말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도, 국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도 이 금전적 보상 문제는 거론하지 말 것을 한국정부에 권고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그들에게 책임추궁과 동시에 사과를 받아야지 제대로 된 사과도 못 받아내고 재정적 보상을 해주라고 하니 한국정부의 체통이 도대체 서지가 않는 느낌이다. 국력이 약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라면 이해가 될 법도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은 한국이 아닌가 말이다.
하나 더 첨가한다면 중재자의 도움, 다시 말해 한국의 말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일본이지만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중재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터키와 그리스처럼 오랜 앙숙지간 같은 상황을 뛰어 넘어 동아시아 연대등 상호호혜의 원칙아래 함께 평화롭게 발전하는 아시아를 꿈꿔봄이 단지 이상향만으로만 남아 있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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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의사, 전 워싱턴 서울대 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