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 중 엘리 위젤이 있다. 그는 결코 행동가가 아니었으나 노벨상 위원회는 수상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위젤은 자기의 체험에서 얻은 메시지를 구준히 인류에게 정달한 증인이었다.” 위젤이 전한 메시지는 ‘평화와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는 악은 결코 선을 이길 수 없다는 신념을 전해왔고 절망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아야 할 것을 외쳐왔다.
위젤은 루마니아에 살던 유대인으로서 온 가족이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눈앞에서 매맞아 죽는 것을 보았고, 인간의 잔학상(殘虐狀)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다행함이나, 일류 작가와 교수가 되었다는 개인적 성공을 즐기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용감하게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외쳤다.
위젤은 노벨상 수상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잔혹한 죄를 고발하고 한 번 받은 생명을 평화를 위하여 사용할 것을 호소한 것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빛의 증인이 될 때 드러난다. 빛의 증인은 누구나 될 수 있다. 한 마디의 친절한 말,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고 좌절된 이웃이에게 용기를 주며, 불행한 사람을 돕고, 차별 받는 자의 친구가 되고, 죄악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곧 빛의 증인이 되는 길이다.
기독교인이란 기독교의 대변자(Advocate)가 되는 것이 아니라 증인(Witness)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요한복음 15:13)고 하셨다.
예수의 친구가 된다는 말은 곧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다. 로마 법정에서는 피고가 사형이면 그의 증인도 사형에 처해졌다. 증인은 피고를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피고와 생사를 함께 하는 친구였던 것이다.
‘증인’이란 말은 그리스 말로는 <말투스>인데 이것은 법정용어로서 이 말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 가 나왔다. 순교자는 꼭 죽어야만 순교가 아니다. 정의와 진리을 위한 용감한 증인이 될 때 그는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승천(昇失)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1:8”)고 분부하셨다. 이 마지막 명령은 예수의 제자들 곧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명령인 것이다. 옛 증인은 생사를 함께 하는 자였으니 예수와 함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기독교 초창기에 수 많은 순교자를 냈는데 그들이 죽음으로 예수의 증인이 된 열매로서 오늘날의 부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 헌병대는 수원 제암리 교회에 남자 신도만 29명을 가두고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여기에서 도망친 오직 한 사람이 서울까지 달려가 아펜젤라 선교사에게 이 일을 알려 아펜젤라가 사진에 남겨 오늘날까지 그 증거가 남았다. 도망친 한 사람은 자기 살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 증인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용감한 증인이 요구된다. 증인이란 곧 십자가를 지는 자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짐으로서 <상처 받은 치료자>가 되었다. 남을 위한 치료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의 상처이다. 심판이란 선행을 세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상처를 세는 것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