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명품언어 교사

2019-05-24 (금) 김재오 코네티컷토요한국학교 교사
크게 작게

▶ 커네티컷 칼럼

미국에 이민 온 후 미처 한글을 배우지 못한 아들을 토요 한국학교에 보내게 되면서 한국학교를 알게 되었다. 첫 교사와 학부모 미팅 시간에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들이 반가웠는지, 아니면 어릴 적부터 국어를 좋아했던 마음이 반응했는지, 가슴이 설레였다. 신기하게도 교장 선생님께서 이런 내 내면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아보셨는지 내가 한국에서 교사 경력이 있는 걸 아신 후에는 나에게 외국인 어른기초반을 지도해 달라 청하셨다.

마음만 너무 앞섰는지 수업은 기대와 달랐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하늘이 왜 파란지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자칫하면 너무 깊게 들어가는 듯하고, 아차하면 대충 넘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헤매니 학생들은 길을 잃었다. 좌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Jason이란 학생이 본인 이름을 ‘제이선’으로 써야 한다고 들었는데, 왜 나는 ‘제이슨’이라고 쓰냐며 메일을 보내왔다. 예전 기억들을 더듬어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을 찾아 해당되는 부분에 동그라미 쳐서 답변해 주었다.

그런데 답변을 준비하면서 내가 놀랐다. 무슨 수학 공식처럼, 명확한 근거와 식에 따라 답이 딱 떨어졌다. 내가 놀란 만큼 그도 감탄했고, 이런 한국어 어문규정의 존재 자체를 신기해했다. Fascinating! Exciting! 이라 반응하며 공감하는데 짜릿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명품의 가치는 디테일에 쏟은 노력에서 온다는 애플 디자이너의 말이 떠오르며 나의 모국어가 명품이라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감을 한 번 얻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매주 교직원회의가 끝난 후 복도 중앙을 지키며 남은 학부모님을 상담해주시는 교장 선생님이 떠올라, 간단한 회화를 가르쳐준 후 교장선생님 성함을 알아오라고 했다. 학생들 표정이 변하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연습한다. 하나둘 긴장한 표정으로 교장 선생님께 다녀오더니 환하게 웃는다. 실제 한국인과의 대화를 마쳤다는 생각에 나름 긴장했는지 말이 많아졌다. 뿌듯했다.

마음이 편해지자 안보이던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왜 파란지를 설명하는 건 과학자의 몫이고, 나는 낮과 밤의 차이를 보고 느끼며 즐기기로 했다.

‘읽다’는 ‘익따’라고 읽었는데, ‘읽어요’를 ‘일거요’라고 읽자, 예상대로 왜냐고 묻는다. ‘영어에서 Walk의 l 은, Knife의 k는, Receipt의 p는 어떤가요?’라고 반문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새로 신발 산 친구를 보며 ‘나, 네 신발 좋아해’라는 영어식 화법을 듣고, 한국 화법으로 말할 땐 ‘신발 멋지다’라고 한다 했더니, ‘네 신발 사랑해’라는 식으로 강조할 땐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진짜’ 를 넣거나 ‘지-인-짜’로 늘리면 더 강조된다고 했더니 ‘진짜?’라며 묻는데, 어릴적 국어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가 떠올랐다. 이렇게 저렇게 조물락 거리면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를 너머 예술이 된다. 지-인-짜 즐거웠다. 게다다 ‘한국어’라는 명품 언어를 다룬다는 자부심이 더해져 자꾸 웃음이 나온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느끼는 게 많다. 꿀 같은 토요일 아침을 반납하고 먼 길을 달려 우리 언어와 문화에 관심 갖고 같이 공감해주는 타민족으로 구성된 나의 학생들이 고맙고, 지금까지 어렵게 이 자리를 만들어 내신 교장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이 감사하다. 나 또한 한국인을 대표해 나의 학생들이 기대하는 한국을 안내해 줄 수 있는, 명품언어에 걸 맞는 교사가 되리라 다짐한다.

<김재오 코네티컷토요한국학교 교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