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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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얼 데이에 기억하는 세 명의 미군

2019-05-23 (목) 김해종/목사·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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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은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았고 내 인생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 15살 이던 나는 졸지에 아버지를 잃었고, 세 동생과 어머님을 모시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1.4 후퇴로 피난생활 한 달만에 안성에 도착했을 때, 내가 끌고 간 손수레에 가지고 나온 모든 것이 소비되어 가장인 나는 일해서 돈 버는 길을 찾아야 했다.

마침 미군 24사단 후방 본부가 안성에 있어 나는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게 되었고 다행히 그 부대 통신학교에 취직을 하게 되어 하루에 1달러씩 받고 미군들의 심부름을 하는 ‘하우스 보이’ 가 된 것이다. 곧 부대는 부평으로 이동 했고 우리 가족도 따라 왔다. 서울은 아직 위험 지역으로, 금지 구역이 되어, 들어가지 못하던 때다.

한사람은 폴 해플 (Paul Happle)이라는 일등병이다. 그는 아이오와 주 농부출신으로 좀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신실한 크리스찬으로 나에게 각별히 친절했고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 본일 없는 나를 부대 교회 (채풀)에 데리고 갔다.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그때, 군인들은 철모를 쓰고 엠 완 총을 메고 교회에 참석해야 했던 때다.


그가 한국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나는 편지로 계속 연락하였다. 61년에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 신학교에 유학하게 되어, 가는 길에 아이오와주 그의 농장에 가서 일주일을 묵었다. 그는 내가 목사가 된다는 것을 크게 기뻐하며 교회 가서 교인들에게 소개 하며 자랑 했다. 후일 내가 연합감리교회 감독이 되어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감독회의 중 ‘패밀리 디너’ 라고 200여명이 모이는 큰 만찬이 있었다. 그를 ‘오너 게스트’로 초대하여 “나를 처음으로 교회에 인도 한 일등병” 이라고 소개 하여 만장의 기립 박수를 받은 일이 있다.

다음은 폴 딘 (Paul Dean) 상사이다. 그는 춘천에 위치한 미 40사단 포병대 본부의 선임 상사였다. 본인이 그곳에서 일할 때 가까이 지내며 내게 영어공부를 열심히 시켜 주던 분이다. 그런데 큰 일이 생겼다. 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을 차출하여 전부 전방 전쟁터에 탄약을 나르는 노무자로 보내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전방에서 내려온 포병대 트럭 한 대가 인천으로 간다는 것이다. 폴 상사는 한밤중에 나를 트럭 뒤에 숨기고 자기가 친히 나를 데리고 야간도주를 시켜 준 것이다. 그는 먼저 취사장에서 감자 가루 여섯 통이 든 상자 두 개를 얻어 싣고 우리 가족이 있는 부평 까지 안전히 데려다 주었다.

물론 나는 그와 편지로 연락 했고 61년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 그를 방문했다. 그는 다우니에서 약제사를 하고 있었고 그의 집에서의 재회,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셋째 분은 미 해병대 존 말러 (John Muller) 중위, 군목이다. 그와는 53년 2월, 수복된 서울에 돌아오기 까지, 9개월이나 같이 일했는데 그 때는 ‘하우스 보이’가 아닌 당당한 통역관으로 나는 해병대 군복에 ‘군목보좌관(Chaplain’s Assistant)‘이라는 명찰을 달고 다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176회에 걸친 설교 통역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되기로 결심 한 것이다.

내가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을 마치자 말러목사는 자기 모교인 미시간주 웨스턴 신학교 입학을 주선해주고 장학금도 마련해 주었다.

성경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장 13절)고 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미군들! 개인이나 국가나, 은혜는 기억해야 되며, 더욱이 배은망덕이란 있을 수 없음을, 이번 메모리얼 데이에,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김해종/목사·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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