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익명의 독지가

2019-05-18 (토) 피터 신/ 포트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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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 농촌에 소작농의 아들로 어려운 삶을 살던 청년이 있었다. 열아홉이 되던 해, 다리가 골수염에 걸렸다. 어려운 처지 그리고 시골에서 어찌 손 써볼 수도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중, 기적 같은 기회를 얻어 수술을 받았고, 완치가 됐다.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겨우 겨우 차비를 마련하여, 일본 오사카로 갔다. 거기에서 어떤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성실함을 인정받아, 그 공장 사장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대신 그 젊은이에게 공장을 유산으로 넘겨주었다.

그 공장은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원료로 전쟁 물자와 기타 광산 기기를 생산하는 업종이었다. 전쟁을 끼고 공장은 번창했고 많은 돈을 벌었다. 독립군에게 돈을 댈 수가 없었기에, 익명으로 조국에 돈을 보내, 여러 학교를 지었다. 지금의 대천 여고, 주산 농고, 초등학교 등 그리고 지서와 소방서 등을 지어 낙후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기의 고향을 배움의 땅으로 변화시켰다.


익명으로 돈은 보냈지만, 그 돈이 누구에서 왔는지는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역에선, 그분께 감사하여 공덕비를 세웠다, 살아서 받기에는 힘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전운을 미리 짐작한 그 분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다음 해 전쟁이 종전되었다.

6.25가 발발하면서, 그분은 피난을 갔고, 공덕비는 공산군으로부터 훼손을 피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묻었다. 휴전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공덕비는 다시 세워졌다. 서울에서 오는 그분을 위하여, 지역의 학생들이 기차역에서 부터 비가 세워지는 학교까지 양 옆에 도열하여 환영하며 박수를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나도 그 속에 끼어있었지만, 그분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행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야 그분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평생 그분은 손으로 하신 일을 절대 나타내지 않았고, 알려지는 것을 금하였다.

그분은 가셨고, 지금은 고향의 초등학교와 도로가 연결된 곳에 공덕비만 조용히 서있다. 그분이 원치 않아 아무도 이 이야기를 말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유지만은 가슴에 담고 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물이란, 어떻게 쓰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버님 성함은 신인철씨로 현재 공덕비가 충남 보령군 주산면 주산 초등학교에 서 있다)

<피터 신/ 포트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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