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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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시초(幻相詩抄)(2)-환각의 꿈이련가

2019-05-08 (수) 박사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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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문예

깨끗한 영혼을 지닌 청년 이상주의 몽상가여
불꽃같은 사상을 꿈꾸고 이 속계를 떠나며
다시 이별 언약을 말자던 소중했던 옛 벗이여
태허의 적멸을 품고 있는 운문산 미사리 찾아갔건만
이른 나이 생사의 환루를 끊고 그대 낙원,
천상위락을 즐기는가?
재의 향불 피워놓고 왕생극락 하시길 합장배례 하네
무심타 야속한 사람, 내 가슴에 간직한 사랑했던 이여
동틀 무렵, 슬픈 노을 벗 삼아
찬이슬 젖은 새벽 하산길
괴어 흐르는 쓰린 눈물을 뿌려
망자의 송가를 읊으리
고적한 송림 샛길,
나는 허허로이 어둠 속을 밟는다
무거운 산 음영에 묻힌 계류의 풍광과
검붉은 산줄기 드러내는 저 모습 자태를 보소
회색 가사장삼 어깨 위에 붉은 주단 가로 두르고
핵도 같은 알큰 긴 염주 목에 걸고 일어서는
두 비구승의 하초 아래 이는 불그스레한 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부처의 우담바라,
내 희망의 꽃을 보았는가?
아, 환시가 아닐런지, 어쭈구리 눈 비비고 다시 보니
찰나에 사라진 석가의 영혼에서 핀 꽃이 아니었던가
이승과 저승, 고해의 경계를 허무는 번뇌의 해탈이여
괭이눈꽃 피는 운몽의 늪,
청계소택 운무 속에서
노닐던 화락천(化樂天)의 팔천세 붉은 선학 두 쌍
사바의 화엄십찰 화엄경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솟구쳐 도솔천 도솔봉으로 날아가는 환각의 꿈이련가
아! 실존의 허무요,
인생유정의 허상이로다
만유를 뜬 구름이라 하거늘,
이 또한 무슨 환청의 조화 속인가
여인의 샅 모양같은 무성한 처녀림 안에 자리한
가람 산문 앞에 동자승 손을 잡고 서 있는 저 불보살
오십육억 칠천만 년 뒤에 오시는 그 미륵보살인가?
미혹하는 저 미소,
가상의 환영이라면 아서라,
벗을 잃고 살만큼 산 망팔의 중늙은이
지난 일 지우는 참회의 길로 귀의하리니
이 길의 숲에 서면 한 그루 나무로 태어나는 것을
모르고 살았구나 너무 멀리 살아온 많은 세월을
이제 개명의 문을 열고 내 그대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리니
옛 벗의 만가를 읊으며
탐욕과 교만에서 벗어나 노년을 다시 일깨우리

<박사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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