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녀상 앞에서

2019-04-30 (화) 07:28:24 김인식 워싱턴 문인회
크게 작게
잎이란 잎은 온통 물들어
햇살이 그냥 노랗고도 붉던 날
유달산 중턱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부엌에서 밥물 넘치는 소리 들릴 때쯤
엄마가 부르면 대답 대신
뒤란으로 된장을 뜨러 가곤 하던 당신은
빈 손으로 찾아간 제게 물었습니다

산비탈 머루 다래는 아직도 달콤 하더냐
등에 업혀 열 삭히던 막내
기침은 이제 잦아들었더냐고


한 데로 당신을 몰아낸 건
누구도 아닌 우리여서, 우리들 이어서

뜯겨진 머리채 언제쯤 곱게 빗어 줄 수 있을지
깨어진 조각 처럼 아린 당신의 삶이
등 뒤에 그림자로 남아 있는데
뒤꿈치도 딛지 못한 시린 발로
오는 겨울 어찌 날지
움켜쥔 당신의 두 손
언제쯤 펴 줄 수 있을지

저는
당신 옆에 놓인 의자에 감히 앉지도 못하고
대답 대신
차디찬 당신의 손등에 내 손을 얹어
다만,
온기 한점 내어 주었을 뿐입니다

<김인식 워싱턴 문인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