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월은 잔인한 달

2019-04-17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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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난지 벌써 두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기온은 아침저녁으로 차고 냉랭하다. 봄이 오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 사방에 노오란 개나리 등 화사한 꽃들이 만개하고 자고 깨면 새순이 나무에 파릇파릇 돋아나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아직도 찬 기운은 살 속을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미국의 계간시인 T.S 엘리엇은 시 ‘황무지’를 통해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는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추억과 율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2014년 4월16일, 한국은 304명의 무고한 목숨이 희생된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충격과 슬픔으로 잔인한 달을 보냈다. 한창 꿈에 부풀어 수학여행 길에 오른 단원고 학생 259명을 포함, 인솔교사와 시민 45명이 기우는 배 안에서 꼼짝없이 바다에 수장됐다. 이 사건은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상처와 아픔이 진하게 남아 있다.


한국은 올해 4월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원도 고성과 강능, 속초 지역을 사상 유래 없는 대형 화마가 휩쓸어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이 일대 시민들이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앗아가는 산불을 바라보며 망연자실, 겨우 몸만 뛰쳐나와 한숨과 걱정으로 날을 보내고 있다. 초대형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앙상한 뼈대만 남아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처참했다. 봄의 행락객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있던 곳이 냉기만 가득한 채 잔인한 달 4월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어디 한국뿐일까. 프랑스의 4월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
15일 저녁 파리에서 화재가 발생해 세계최대 관광명소중의 하나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지붕과 첨탑이 붕괴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당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는 프랑스 전국민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흐느꼈다. 성당은 860년 된 세계적인 인류문화 유산으로 프랑스 국민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가의 랜드마크로 여겨질 만큼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세계인들도 하나같이 내 일처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인 에펠탑보다도 더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문화재로 두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끄떡없이 견뎌냈다.

이 성당은 특히 종과 얽힌 유명한 영화 때문에 더 우리에게 가까이 와닿는다. 영화는 우리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노트르담의 꼽추’이다. 성당 광장에서 춤추는 집시를 둘러싸고 마음을 빼앗긴 주교와 근위대장, 그리고 집시를 사랑했던 종지기 꼽추간에 사랑과 치정을 위주로 한 영화지만 꼽추의 순수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진한 울림을 주었다.

마지막에 주교가 칼로 찔러 죽인 근위대장에 대한 죄를 집시가 뒤집어쓰고 교수형을 받고 끌려가는 것을 꼽추가 피신시켜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하지만 근위대 공격으로 집시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꼽추는 비극의 원인 제공자인 주교를 죽이고 자신은 집시의 시신을 안고 영원히 잠든다. 이 영화 탓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이번 화재는 우리에게 더 진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뜻하지 않은 재해로 고통 받고 슬픔에 쌓이지만 이 비극은 씨앗이 되어 다시 희망으로 승화하리라.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고 병들고 처참하게 무너진 곳에서 피어난다.

시인 도종환은 ‘희망의 바깥은 없다’고 노래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은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4월은 잔인하다고 하지만 절망에서 희망은 솟는다. 노트르담의 대성당은 또 다시 붉을 환히 밝힐 것이다. 3,000여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9.11테러의 희생지인 맨하탄 트윈타워 자리에도 희망의 그라운드 제로가 버젓이 서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지 있는가. 노트르담 성당도 더 위대한 모습으로 재건돼 또 다시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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