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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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2019-04-15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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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은 ‘성(聖)금요일’(Good Friday) 혹은 고난일(苦難日)이라고 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날로서 전 세계의 교회들이 금식기도와 특별한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의 큰 명절이다.

상징(Symbol) 중에 십자가만큼 보편화된 상징은 없을 것이다. 여인들의 목걸이에도 십자가 목걸이를 흔히 볼 수 있다. 원래 십자가는 옛 그리스의 사형 형틀이니까 보기에도 끔찍한 상징이었는데 지금은 금 십자가, 은 십자가 등 값비싼 패물이기도 하다. 미국인 목사 한 분이 서울을 방문하였다가 밤경치를 보려고 남산에 올라갔는데 장안을 가득 메운 빨간 형광등 십자가의 숲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볼 수 없는 많은 십자가가 서울의 밤하늘을 누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십자가는 예수를 상징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상징도 되어왔다. 그래서 어느 교회당이나 강단 정면 벽에는 큼직한 십자가가 걸린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갑자기 온 세상에 어둠이 덮였다고 한다. 이 흑암은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암흑의 세 시간은 심한 고통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투쟁의 세 시간이었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세 시간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죽음의 순간을 앞두고 “내가 목마르다.”고 외친다. 물론 이 말은 예수가 육신의 갈증을 호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갈증이었다.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는 위대한 갈증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수의 사랑의 갈증을 나도 체험하고 예수와 함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생활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누가복음 14:27)고 단적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자격으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십자가를 형틀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그 정신을 본받는 생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생활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예배 출석, 성경공부, 설교 듣기 등이 중요해진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에게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요, 손실이고 후회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십자가를 실제로 진 자에게는 자랑과 기쁨과 영광이 된다. 그러기에 크리스천들의 행복이란 십자가가 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질 때가 소위 은혜 받은 때이다. 예수가 진 십자가를 자기도 졌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감사하게 되고 기쁨이 솟는다는 역리(逆理)가 성립하는 것이다.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생략한(by-pass) 속죄는 있을 수 없다.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예수는 죽어야만 하였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자(聖子)가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러니 그 당시 유대교의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매수된 무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하고 재판관인 총독 빌라도를 향하여 외칠 때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계획이 착착 이루어짐을 알고 만족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내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야한다.”(누가복음 13:33)고 자기의 십자가를 향한 길을 분명히 알고 그 길로 가고 있었다. 그 길이 심한 고통과 죽음의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향하여 똑바로 전진하였다.

메시아(구세주)의 사명을 확실히 아는 용감하고 희생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24)는 자신의 교훈을 몸소 실천한 것이 곧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이었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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