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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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형수님

2019-04-03 (수) 김진원 뉴저지 저지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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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문예

내가 서울을 방문할 때면 찾아뵙는 분이 계시다. 그는 한때 우리 집안의 기둥이었던 형수가 되셨던 분이다. 현재는 어떻게 호칭을 해야 할 지 매우 모호한 입장이다.
그는 1948년 12월 방년 18세의 나이로 우리 집안 사람이 되었다. 우리 집에는 조부모, 부모, 우리 형제 다섯 명이 살았는데 여자라고는 할머니와 어머니다. 그런데 꽃같은 며느리를 맞은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워 감히 일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친구 중에서도 가장 먼저 결혼을 한 형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사서 우리를 서울에서 교육시키려 하셨다. 그런데 1950년 6월25일 새벽 2시 몇 달을 가물던 때에 억수같은 비가 천둥을 동반하며 전쟁이 발발하였다. 처음은 포탄 소리인지 천둥 소리인지 분간이 안되었는데 이것이 동족상잔의 서막이었다.
그 당시 형수는 출산 한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고 전쟁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형이 공산당에 협력하다가 행방불명이 되면서 우리 집안의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쳐왔다. 새로 시집 온 새색시한테 무슨 죄가 있고 책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수시로 수사관이 찾아와서 괴롭히는 것이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친정으로 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휴전이 되고 사회가 안정이 되면서 우리집의 희망이요 기둥은 물거품이 되었다.

형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는 하나 자식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형수와 우리 집안이 연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서울을 방문했는데 조카가 어머니가 여기 양로원에 와서 계신다고 하여 함께 방문하였다.

수십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아름다운 자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을 말할 수 없었으나 막상 만나니 인사와 건강을 묻는 것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서울을 방문 할 때면 그 계신 곳을 방문한다. 그곳에 동생과 함께 있었다. 지난 번에는 조카가 하는 말이 어머니가 이모와 심한 언쟁을 한 후 따로 산다고 했다. 우리 식구로 생활한 시간은 몇 년 되지 않았기에 큰소리를 내거나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평탄하게 함께 살았다면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고 야단도 맞아보았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그의 본심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분도 평범한 인간일 것이다.

우리 선영에 형제들과 함께 할 동원을 조성하였다. 살아서는 비록 함께 하지 못하였지만 사후에는 함꼐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김진원 뉴저지 저지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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