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변하지 않는다
2019-03-28 (목)
동진 스님/SAC 영화사 주지
봄이 오면 쑥이랑 냉이랑 뜯으러 나가던 고향 들판이 보이고 쑥향도 실지로 난다. 아마도 향수병이 이리 오나 보다 한다. 이런 맘을 부처님이 아신 걸까. 영화사 들판엔 지천으로 씀바귀가 난다. 캐서 고추장에 버무려 장아찌를 담그면 그리움의 맛이 난다. 봄마다 이 중은 한국 절에서 하던 대로, 영화사 도량에 핀 매화 꽃봉오리 뜯어 매화차도 만들고, 소나무 순 뜯어 송차도 만들고, 뽕잎 뜯어 나물도 만들고...한다. 하지만, 다른 정서 탓일까. 여기 사람들은 꽃차를 주면 꽃 알러지가 있다고 타박이고, 송차를 주면 술냄새 난다, 씀바귀 장아찌는 짜다며 활짝 반기질 않는다. 시나브로 만드는 일도 시들해져 버렸다. 다른 한편, 기른 거, 담근 거 맘껏 먹이지 못해 서운하고, 비록 파는 거에 비해 투박스러우나 생명에 좋은 걸 왜 모르나, 아쉽기도 하다.
요즘 세상엔 좋은게 너무 많다. 특히 편한 거. 인스턴트다. 채소까지도 상점에 있는, 그것도 말끔히 씻어 담아 놓은 놈을 좋아라 한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리 굴러가는데 하며, 모두가 편한 것을 얻기 위해, 불편함을 꾸역꾸역 참으며 일터로 가고 온다. 아이러니다. 말끔한 거, 좋다 치자. 그러나, 팩에 담긴 말끔한 채소들은 일주일을 둬도 썩지 않으며, 달콤한 도넛은 꺼내 놔도 개미도 먹지 않고, 한 달이 가도 그대로다. 딸기를 쥬서에 갈면 농약 냄새, 소독약 향기가 훅 올라온다. ‘방부제 미모’ 어쩌고 하는 최신 우스개 말이 이 중은 그냥 나온거 같지 않아 섬찟하다. 우리는 방부제를 먹고 마시며 바르고 씻고 함께 산다. 인연법상 방부제 미모 소리가 나올 수 밖에. 물론, 그걸 알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무섭게도, 안 늙고 변하지 않았다는 걸 방부제로 대변하는 거 같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하지 않는다, 와 일맥 상통 하며, 그 이면엔 썩지 않는다,가 있다. 썩지 않으면 소멸되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으면 축적된다. 축적된 것은 공간을 점령하며 공간을 점령당하면 결국 사람은 치인다. 치이면 살기 힘들고 살기 힘들다는 건 결국 죽겠단 말이다. 세상에 썩지 않고 상하지 않는 것들만 존재한다 생각해 보라,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낙엽 썩어 흙이 돼야 함을, 무상의 도리를,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노화와 풍화와 상함과 소멸이 ‘내게’ 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그것을 잘못이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변함없이 오래 살고 싶다는데. 변하지 않는 거 좋다, 좋은 면만 있다면. 세상엔 다 좋기만 한 것은 절대 없다. 썩지 않는 것들, 이 세상에 점점점 많아져서 지금 지구는 쓰레기로 넘쳐난다. 물론 일체 존재가 무상하므로 언젠가는 플라스틱도 저 많은 포장지들도 사라질 것이다. 다만 사람 수명이 아무리 길어졌다고는 해도, 플라스틱에 비할 바 못된다는 게 문제다. 그럼에도 꽃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그 철저한 자연의 순환 고리에서 인간 만은 자연이 아닌 듯, 무관한 듯 산다. 그러나 그 인과에서는 절대 무관할 수 없다. 잘 알 듯이 뿌린 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중이 걱정한다고 크게 바뀔 일도 아니지만, 세상이 아픈데 걱정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걱정 안 되는 이가 더 많아 이리 굴러 가는 건가? 상관 없이, 걱정 되는 이가 변하면 된다. 다만 할 뿐, 시비는 필요 없다. 오늘도 이 중은 오욕의 세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올봄 처음으로 돋아난 두릅 한송이에 환희작약하다가, 오래 상념에 젖는다. 이 생명의 아름다운 순환을 두릅은 이렇게, 제 몸 버림으로 여실히 보여주는 데, 그 자비와 희생에 관심 있는 이가 없다.
<동진 스님/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