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서 일구어 낸 역사들을 얘기할 때 곧 잘 중국의 황하와 양자강의 얘기로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것은 어떤 거창한 이데오로기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당면한 악조건들이 오히려 벌떡 일어나 살게 하는 힘이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 흐름이 유연하고 맑고 하구에는 비옥한 삼각지가 있어 사람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양자강가에서가 아니라, 그 보다 북쪽에 있어 긴 겨울동안엔 꽝 얼어붙고 물 자체가 황토물에다 물살조차 거칠어 사람이 그냥 편안해서는 살 수 없는 상황인 황하에서 방대한 중국을 이끌어 가는 중국 문명의 근간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황하 같은 거친 물살을 헤치느라 밤잠을 설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서는 다 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뒤척이는 밤을 정리해 주시곤 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우박창고를 보았느냐
공중에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
천지에 가득하신 하나님!
왜 그렇게 그때는 부실부실 축축한 날이 많았던지... 유별나게 천사원 뜰에만 더 잦은 비가 내렸던 것인가 싶다. 그런 쓸쓸한 날이면 더 의지없어 보이는 이 아이들에게 먹일 것 밖엔 아무 다른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이 따분한 분위기를 신바람으로 바꿀수 있을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하물며 이 어린 아이들일까!
어서 와서 이 소 뼈다구들 줏어가라는 전보라도 받은듯 마장동 소시장으로 불광동 야채시장으로 뛰었다. 구수한 우거지 곰탕으로 천사원 뜰 안은 그만 부잣집 잔칫날이 아니었던가. 피곤할 겨를도 아플 틈도 없이 뛰던 그 때가 얼마나 살맛나는 이유 탄탄한 시절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니 감히 천금 같은 축복이었구나 싶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지랭이 만도 못한 우리들, 누가 조금만 밟아도 서러워 밤잠을 설치고, 조금만 꼬집혀도 불끈 불끈을 못 참아내는 혈기왕성에게 그렇게 큰 일, 아무나 못 할 일을 맡기실 수 있으셨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못 하시는 가 보다.
낮에는 학교 동문이라던지, 교회 또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줄’이 닿는 친지들을 다 찾아다니느라 바뻣다. 맨날 황당하고 허기진 소리만 가지고 찾아가는 사람을 기다렸다는듯 얼싸 안고 뜨겁게 맞아주던 그들! 하나님의 심장이 아니고는 천하에 어떻게 그런 하늘같은 마음들이 있을수 있을까! 세상은 온통 착한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연탄 만드는 강원연탄, 경영기로에서 투쟁하던 제약회사, 뿐 아니라 학교 동기로 교직에 있던 친구들. 특별히 이만복 선생(년전에 벌써 고인이 되었다) 이 교무주임으로 있는 숭실고등학교에 우리 원생들을 입학시키고는 우리 아이들 한테 등록금 재촉하지 말아라(그때는 고아원 아이들도 기성회비를 제외한 등록금을 내야했다), 내가 준비되는대로 납부할 테니 ‘부탁한다’ 로 혀짧은 소리만 하고 다녔던 시절이 이제는 다시 해 보기 어려운 꿈 같은 얘기다.
나이 80 되어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괴로워 하는 나이라니, 혀짧은 소리도 할 때가 따로 있구나 싶다.
외람된 말같지만 이제야 간간히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셨던 질문들이. 아직도 우리로는 대답하지 못 할 질문들로 우리에게 답을 가르쳐 주시고 계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좀 정리된 세모를 맞자 하고 책상주변을 치우다 보니 가끔 오래된 사진들이 소개되어 있는 빛바랜 신문 사진들이 나온다. 그저 잊고 있었던 한 시대의 풍경들이건만 그 시대의 실상들을 덧칠없이 불러낼 수 있으니 망중한이란 이런 것일까. 얼떨결에 꽤 긴 시간을 그 사진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요즘에는 찾아보기도 힘든 공중전화 부스, 그 공중전화 부스앞에 길게 줄 서 있으면서 전화기 사용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기껏 줄서서 기다렸다가 집에 전화 걸어서 ‘제게 전화 온 데 없어요?’
한마디 묻기 위해 기다란 줄 차례를 지켜 서 있었던 시절에 잡히니, 우리가 그런 완행세상을 살았다는 게 여간 신기스러운게 아니다.
일본 식민치리하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앞을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나 다니던 시절. 내가 한참 여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던 그 당시의 이름 ‘중앙청’ 옆길엔 은행나무들이 우리들의 걸음걸이 만큼이나 단정했었는데.....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행차하신다고 수업시간에 공부하다 말고 길에 나와 질서있게 태극기를 흔들어 그의 국정 출입을 배웅했던 수십년 전의 일들이 순서도 없이 펄러덩 거린다.
툭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치부될 법한 얘기들이지만 세월이 변한 만큼 이 역시 역사라고 할까 변천사 라고 할까 뭐 그런 것중에 드는 것이 아닐까. 하룻밤 자고나면 번갯불처럼 뻔쩍! 횡~ 달아나 버리는 디지탈 세상을 따라가느라 헐레벌떡 세대가 다소나마 숨을 돌리자니 자연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레코딩뿐인데, 고장났나 돌고 또 돌고 한다. 그럴지라도 물 살 거친 황하를 살아내느라 적잖이 지친 이들에게는 다 잘 아는 사실들 일지라도 가끔 되짚어 봐도 나쁠 것 없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야기.
그렇다. 어제의 황하를 기억하며, 아직도 여전히 풍랑이 요란한 악조건뿐일지라도 거친 물살을 타고 살아 온 사연들과 함께 노련한 노구를 다시 일으켜 서야 하리라.
그 도량을 누가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여전히 지금도 묻고 계신 하나님! 질문으로 답을 가르쳐 주시는 그 은혜에 감격하며, ‘오늘이 마지막 이라면 나는 어제와 같이 살리라!’ 던 죤 웨슬리의 고백에 조심스레 내 마음을 올려 놓으려 하니 쓸만한 것 하나없고, 수로 셀수 없는 부끄러움들 뿐이나 그래도 믿음의 약속을 지키려 무진 애써왔던 젊은 날의 미숙함이 다 실패만은 아니었다 싶은 마음도 함께 고개를 든다.
그렇다. 이제 그 미숙함이 오히려 겸허한 노년을 맞게 하리라. 만입으로도 다 하지 못 할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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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자 / 뉴저지 레오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