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행

2019-03-22 (금)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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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감기로 여러 날 고생하다보니 감기만 떨쳐내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감기에서 벗어나니 감기로 힘들었던 기억들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리고 또 몇 주를 다른 일로 바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일에서 벗어나 다시 여유로운 시간이 간절했다. 그렇게 망각과 간절함 사이에서 주말을 맞았다. 모처럼 느긋한 산행을 하기로 하고 가까운 공원을 찾아 나섰다.

저만치 앞에서 한 사람이 산모퉁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모퉁이를 돌면 나타났다가 한참을 따라가면 그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놓칠 새라 조급해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그가 보이면 안도했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낯선 그를 동행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잔설이 남아 있는 산기슭에서 숲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래서 모든 곳으로 통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잰 발걸음을 옮기느라 발밑을 살필 겨를이 없어 살얼음에 쉽게 미끄러졌고, 끝내는 두어 차례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의 발자국을 찾아 그 위에 다시 내 발자국을 얹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나는 그의 일행이었고 그는 나를 인솔하는 가이드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한참을 따라 올라간 곳에서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산 아래로 강이 흐른다는 것을 알았다. 숲 사이로 보이는 강물은 깊고 푸르렀다. 내가 그와 나란히 섰을 때 그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냈다. 비록 서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는 강 아래쪽을 가리키며 운이 좋으면 흰머리 독수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경계도 없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시인은 살아가는 것은 경계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남아 있고, 늘 그곳에 있으나 확인 할 수 없는 향기처럼 우리들 삶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이쪽에서 보면 안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밖이 되는 것을 경계라고 한다면, 어차피 안과 밖은 구분되어 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계에 섰을 때에 비로소 안과 밖이 함께 보이니, 결국 경계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동시에 공유하는 것인 셈이었다. 멀리서 보는 풍경과 가까이에서 보는 풍경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삶은 날마다 다른 얼굴로 우리와 마주보고 있었다.

때로는 옳았고, 더 많은 경우에 후회와 회한을 남긴 결정을 했을지언정 이제 그런 삶도 익숙해졌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 적당히 타협해 가는 것이어서, 안과 밖이 모두 틀렸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 모두가 옳다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 겨울에서 보는 봄이 그렇고 봄에서 보는 겨울이 그런 것처럼, 안에서 보는 밖과 밖에서 보는 안이 결국은 같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빳빳하게 풀 먹인 마음으로 시작한 새해도 벌써 1/4이 지나간다. 그 시간 안에 긴 감기처럼 훌훌 털어내지 못한 일상에 갇혀 쉽게 의기소침해지던 겨울밤이 있었다. 안개 속에 갇힌 것 같다는 아내의 투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건너던 겨울강도 있었다.
미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보낸 까닭에 ‘쉼’이 절실하다. 그러나 생활은 그보다 더 절박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봄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작고 여린 것에 자꾸 눈길이 간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봄이 왔다고 쓴다.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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