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1운동 100 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가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글이 각종 언론 매체에 게재되면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약육강식의 자연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인류역사를 통해서 보면 흥망성쇠와 생사여탈은 계속되고 있다. 가까운 예로 같은 민족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수처럼 각축을 벌였던 시대가 있지 않았는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친중, 친일, 친러, 친미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 왕조 때에는 당파싸움으로 국력을 탕진하다 못해 일본의 속국으로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1945년에 해방을 맞았으나 미소 냉전의 분출구로 한국전이라는 동족상잔까지 겪었고 그 후유증이 7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징병과 징용, 성노예 등으로 잡혀간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어두운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들임에 틀림없지만, 따지고 보면 평범한 일본인들 역시 2차대전의 희생자요 피해자들이다.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다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한 흑인들 또한 인류 역사상 큰 피해자들이다.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참전용사들 역시 어두운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이런 질곡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을까?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자연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 온 서양 물질문명의 ‘원죄의식’과 ‘선민사상’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홍익인간이나 인내천 사상을 온 세상에 펼치는 것이 답이 되지 않을까.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 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되새겨 보자. “강물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다./ 햇빛은 스스로를 위해 비추지 않고/ 꽃들은 스스로를 위해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이다./ 네가 행복할 때 네 삶은 좋다./ 하지만 너 때문에 남들이 행복하면/ 그것이 훨씬 더 좋은 삶이다./ 남을 위해 살지 않는 자는/ 삶을 살 자격이 없다./ 우리의 본질은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나그네인 '코스미안’ 의 참된 소명이고 친인(親人), 친지(親地), 친천(親天)파가 되는 길이 아닐까.
82년 남짓 살아온 내 평생의 소신을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글이란 쓰는 게 아니고 사는 거며 말이란 말로 하는 게 아니고 행동으로 하는 거라고, 그 아무리 훌륭한 문학이나 예술작품도 기껏해야 삶과 자연의 모조품에 불과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길 도(道)나 사랑도, 사상이나 철학도, 또는 종교나 진리도 결코 새장 같은 틀에 가둘 수 없다고, 하늘의 구름이나 바람이나 빛이나 아니면 바다의 물, 아니 별처럼 말이다.
어쩜 그래서였을까. 2013년 출간된 내 영문판 졸저 '코스모스 칸타타(Cosmos Cantata)' 출판사 대표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바치는 송시 한 편을 헌정 받았다.
이 짤막한 시 한 편이 누구에 관해서인지 알아맞혀 보시라.
인생이 저무는 때에/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들을 칭송하리라/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해/ 그 빛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그런 사람들을 칭송하리라/ 신뢰와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통해 기쁨을 널리 뿌리는/ 그런 사람들을 칭송하리라.
소우주 자신을 통해/ 대우주 코스모스 고향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들을 칭송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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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