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인 남성 우월주의 고질병”

2019-03-12 (화) 김성실/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 인종정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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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체스터 칼럼

오늘날 미국 교계에 아직도 남성우월주의, 백인우월주의가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150년 전 여섯 명의 용감한 여성들이 강단을 내 시작한 감리교 여선교회의 해외선교는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것도 괄목할 것이지만, 미국사회의 성평등과 인종평등 운동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직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여선교회의 인간평등을 위해 소외된 이들을 섬기려 헌신하는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기독교인이라면 선교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감리교인이라면 책임의식을 느끼게 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여선교회 역사는 인종차별의 역사를 병행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그 당시 성차별의 피해를 받으며 살던 백인여성들은 인종차별의 피해를 받는 흑인들의 입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에 쉽게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주었으며, 비록 사회에서 인정되었던 노예제도였지만 잔인한 대우를 받던 그들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모성애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1863년 아브라함 대통령에 의해서 노예폐지가 선언되고, 2년 후에 법적으로 흑인들에게 시민권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당장 식생활을 해결 할 방안마련이 없고, 노예시절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해 자유인이 되었어도 글을 읽을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여전히 참담하고 암담한 삶의 연속이었다.

다음 해인 1866년에는 백인우월주의 자들이 ‘Ku Klux Klan’(KKK)을 창단하여 흑인들에게 이유 없는 협박과 폭력을 일삼아 그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성차별이 공공연했던 이 시대에 교회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도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목회자 자격과 평신도 지도자는 남성들에게만 주어졌으며, 많은 봉사를 한 여성들의 이름이 교회 서기록이나 선교 뉴스레터에 기록되는 경우는 그들의 남편이름을 사용하고 앞에 Mrs.를 붙여 표기 되었다.

노예폐지 6년 후인 1869년에 여선교회 모임이 창립되어 열악한 환경에 있는 해외여성들에게 이웃사랑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며 국내 선교 중의 일환으로는 1873년에 흑인여성들을 위한 최초의 학교 Bennett College를 세웠으며 뉴멕시코 주에 거주하는 어려운 상황의 멕시코인들을 교육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원주민들이 억눌리고 핍박 받은 부당한 입장을 알리며 개선하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대변하기도 했다.

여성들이 제도적 차별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헌신하여 모은 많은 모금액을 남성 지도자들은 여선교회 이사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이사가 되어 예산을 컨트롤 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선교비를 보내고자 억지로 여성이사의 권한을 빼앗고 예산마저도 앗아간 불행한 예가 많은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여성들이 해외 선교지에서 남성들을 가르치며 지도하게 되는 경우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도 국내의 유럽계 남성들을 지도하는 것은 절대 금지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성의 평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성들이 싸워 나가야할 개인적, 제도적 도전이 끊임없이 남아있을 것이다.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우월주의의 고질병은 하루바삐 퇴치시켜야할 전염병이다.

<김성실/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 인종정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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