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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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3.1 만세운동

2019-02-25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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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로 이어지는 기미년(己未年)의 독립선언문 마지막 부분은 마치 성경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독립선언문 서명자 33인 중 이상재 선생 같은 무저항주의자, 길선주 목사 같은 사랑의 사도가 있었고, 독립선언문 기초자인 최남선은 평화주의자인 전덕기 목사(상동교회)댁에 기거하면서 평화사상을 몸에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3.1 만세운동을 비폭력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독립선언문 서명자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다. 그 당시 전국의 기독교 신자는 26만 명(인구의 1.5%) 밖에 안 되는 극소수의 집단이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다. 사학자 이만열 교수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약 1,400 군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사료에 남은 곳은 323 지역이다. 그 중 78 지역이 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천도교 중심이 66곳,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하여 거사를 일으킨 지역이 42곳이다.

따라서 조직적으로 움직인 323 지역 중 120 곳이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주축으로 일으킨 만세운동이었다. 기미년 당시 2,100 개의 전교회와 26만 명의 전교인이 단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거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존경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한국 인구의 21%라는데 과연 민족의 선구자가 되고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기미년에 교회당 소실 80처, 기독교 계통학교 파괴 8개교, 투옥된 교인 3,373명, 목사 54명, 전도사 157명, 장로 63명이 감옥에 갇혔다. 일제(日帝)는 어린 여학생들을 십자가에 알몸으로 매달아 인두와 칼로 고문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다.(박은식의 한국독립사) 그러나 조선의 크리스천 여학생들은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죽어갔다. 신앙의 힘이었다.

3.1만세운동 직후, 즉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는 선교사 대표 9명을 초청하여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마펫 선교사, 노불 선교사, 웰치 감독 등이었는데 모두 30년 이상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이다. 3.1운동을 기독교가 주도한 이상 그 원인을 분석하여 재발을 막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일제 관헌들에게 말하였다. “조선인에게는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의(義) 곧 정의로운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이 분석한 조선인의 가치관은 떳떳함과 의를 따라 사는 것이므로 잘 살게 해 줄 테니 굴종하라는 통치방법은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은연 중 일제 관헌들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즉 갇힌 데서 풀어주고, 눈을 뜨게 해 주고, 압박에서 놓아주는 것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세계의 신학계는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을 서남동, 문익환 등이 정립한 ‘해방신학'이라고 말한다. 해방신학이란 예수 자신이 천명한 인간의 해방, 곧 모든 눌림으로부터의 해방이 교회의 사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명은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른다.

뉴욕 주 의회가 금년 3.1만세 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기념의 날’을 뉴욕 주가 축하하고 기념할 날로 공식 채택한 것은 온 국민이 기뻐하고 환영할 쾌거였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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