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병과 간호사’

2019-02-22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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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SS', 혹은 ‘수병과 간호사’ 란 제목의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상징하는 사진을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 사진은 1945년 8월14일 2차대전 종전을 축하하며 뉴욕 타임스퀘어로 쏟아져 나온 수만 명의 인파 속에서 검은색 해군 수병 복장의 병사가 흰색 가운을 입은 간호사 복장의 여성을 끌어안고 키스 세례를 퍼붓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남성의 이마와 눈썹, 여성은 끌어안긴 채 뒤로 젖혀진 이마와 머리만 보일 뿐이다.

이 유명한 사진의 남자 주인공인 조지 멘돈사가 지난 2월18일 뉴포트에서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여성 주인공인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은 지난 2016년 9월에 사망했다. 라이프 매거진 사진작가 앨프리드 아이젠스타트가 찍은 이 사진은 종전의 상징이 되었지만 60년간 주인공을 알 수 없었다.

2000년대 중반 해군전쟁박물관이 고고인류학 기법을 동원해 남녀 주인공을 알아냈으며 본인들도 자신이 맞긴 한데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수병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다시 태평양 전장으로 가지 않게 되어 흥분했다.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기쁜 나머지 한 여성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이 간호사는 근처 치과에서 일하다가 역시 종전 소식을 듣고 타임스퀘어로 나온 길이었다. 두사람 뒤에 같이 찍힌 여성은 웃으며 이 둘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여성이 실제로 수병과 데이트한 여성으로 훗날 결혼하여 66년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멘돈사가 눈을 감자마자 ‘미투’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ABC 방송에 의하면 미 플로리다의 조각상 여성 간호사의 왼쪽 종아리 부분에 빨간 스프레이로 ‘# MeToo (나도 당했다)‘ 는 낙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인 2,400명이 사망하자 미국인들은 격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폭이 투하되고 1945년 8월14일(한국시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그날 밤 뉴욕 타임스퀘어에는 사상 최대의 군중들이 모여 열광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남편과 아버지, 아들이 돌아온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니 이 수병도 만나는 사람마다 껴안고 키스세례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얼마 전 제76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로마(ROMA)'를 보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자신을 돌봐준 보모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데 요즘으로 치면 ‘나쁜 남자들의 세상’이다. 1970년대초 멕시코시티 로마 거리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보모 클레오와 주인여자 소피아가 남자의 바람과 배신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영상, 연출이 뛰어난 흑백영화가 주는 깊은 여운이 각종 상을 독식하고 있는데 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여성 잔혹사’라 흥분하지 않는가.

소피아의 남편은 바람이 나 아내와 네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고 클레오의 남자친구는 임신했다는 여자를 쫒아버린다.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격랑 속에 클레오의 남자는 우익세력 정치깡패가 되어 학생들을 죽이고 이를 본 클레오는 아이를 사산한다.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이 여성들에게 왜 그렇게 살았냐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가수 더러 ‘왜 네가 부르는 노래 가사처럼 순정으로 살지 않고 이혼을 하느냐’ 할 수 없듯이 작가더러 ‘왜 당신 글처럼 원칙대로 살지 않느냐'고 따질 수는 없다. 수년 전 인터넷에 올린 여성과 남성 누드를 그린 명화에 검정 테이프를 부분적으로 가린 사건은 좀 우스웠었다.

예술이 아닌 외설로 본다면 메트 뮤지엄을 비롯 세계각국의 수많은 남녀 올 누드 조각상마다 부분적으로 헝겊이나 테이프로 가려야 하지 않는가. 지금 와서 미투의 잣대를 들이대면 남아나는 예술작품이 없겠다. 그냥 영화는 영화고 사진은 사진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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