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아이들과 함께 배낭여행을 해보자는 아내의 제안이 저녁 식탁에 올려 졌을 때만 해도 그 여행이 실현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주고받은 낯선 도시가 목적지로 정해지고 주변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검색하며 점점 구체화 되어가는 과정의 시간들이 선물처럼 지나갔다. 숙소와 이동수단을 예약하는 것부터 사소한 계획에 이르기까지, 다른 도시에 사는 아이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나누는 일도 즐거웠다. 여행은 계획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여행의 가장 어려운 관문을 지난 셈이었다. 난생 처음 청바지를 입고 배낭을 맨 내 모습이 유리창에 비춰질 때마다 낯설어 하면서도, 아이들과 똑같은 모양의 패딩 점퍼를 입고 나란히 앉아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도, 훌쩍 떠나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스페인의 말라가(Malaga)였다. 최종 목적지로 삼은 모로코 (Morocco)의 도시들로 이동하기에 편리한 지역이기도 하고, 여행 일정에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쉬어 가기에 좋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인 데다 스페인 남부 지역의 오래된 도시와의 교통편도 좋은 편이어서 아이들도 만족해했다. 말라가 공항에서 미리 렌트해 놓은 자동차를 타고 세비야(Seville)로 가는 차의 운전을 아내가 맡아 준 덕분에 조수석에서 앉아 해가 지는 안달루시아 평원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눈에 익은 세비야 대성당은 낯선 여행객을 넉넉히 품어 주었다. 유한의 인간이 수 백년 동안 하나의 염원을 공유하며 ‘세움’을 이루어 낸 공간 안에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었다. 노년의 신사들로 이루어진 성가대 단원들의 모습도 신선했고, 비록 음색이 고르지 않았으나 이른 시간부터 준비했을 수고로움이 그대로 느껴져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말라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여행의 일부였다. 기차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몇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며칠짜리 여행으로 바꾸어 놓으니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로웠다.
피카소의 고향에서 피카소 미술관 앞에 줄을 섰으나 박물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비좁았고, 주로 초년기 회화와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에 익숙한 나는 감동이 반감 되었다. 오히려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알카자바(Acazaba) 관람 후 우연히 들어간 말라가 박물관은 오히려 고즈넉하게 머물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었다.
어쩌면 우리 삶도 큰 기대를 가진 일에 쉽게 실망하고, 뜻밖의 곳에서 선물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되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은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임을 배운 여행이었다.
나무의 밑동을 덮은 눈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다시 눈이 온다는 예보를 듣는다. 숲을 차갑게 태우며 겨울 해가 지고, 그 속에서 잠든 생명을 깨우는 것은 봄의 몫으로 남겨둔다. 오늘도 TV의 여행 채널에서는 오지를 탐험하는 여행가가 산 위를 걸으며 숨을 고른다. 나는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며 지도를 검색한다. 그리고 오늘을 여행 첫째 날이라고 적는다.
<
최동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