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장벽 허물기

2019-02-15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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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과 민주당의 연방의회 협상대표들은 11일 트럼프 대통령이 셧다운 방지 협상 시한으로 정한 15일을 앞두고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에 국경장벽 예산으로 13억 7,500만 달러가 배정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57억 달러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새로 건설되는 장벽 길이는 55마일로 합의됐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장벽 건설해 보았자 별 효과 없다고 하겠다. 마약과 테러범들은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 밀입국자 3분의 2가 비행기를 타고 가짜 비자나 신분증으로 공항이나 국경검문소로 들어오거나 직접 판 땅굴로 들어온다. 지난 28년간 미 당국이 동남부 국경지대에서 발견한 땅굴이 200개 이상, 지금도 여기저기서 더욱 튼튼하게 파여진 땅굴이 발견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은 리오그란데 강을 끼고 3,169Km에 이르는데 대부분 4~5미터 장벽으로 1994년 완성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출마 공약으로 이 장벽들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장벽들이 세워져 있다. 중국-북한 장벽, 헝가리-세르비아 장벽, 터키-그리스 장벽, 이라크-쿠웨이트 장벽,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평화선, 이란과 파키스탄 국경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지역구분 장벽 등등이다.

이 장벽들은 오랜 종교 분쟁의 산물인 구교와 신교간 충돌이나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 다른 나라와의 국경 등을 보여준다. 그 중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현재 지구상에서 관심이 높은 장벽이다. 지뢰와 철책에 무장한 군인이 경비하는 삼엄한 곳이다.

처음 미국에 와서 신기했던 것이 집집마다 담이 없는 것이었다. 덩그러니 집채가 사방팔방 노출되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이웃집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와 마주치면 인사를 했고 앞뜰의 꽃은 남들이 보라고 예쁘게 손보아야 했다. 부촌으로 갈수록 차고를 둘러싼 펜스도 치고 하지만 중산층 하우스는 담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도둑 걱정은 안했다.

어린 시절, 콘크리트나 시멘트 담 위에 꽂힌 유리조각이 기억날 것이다. 새로 집을 짓거나 고치면서 시멘트가 굳기 전에 꼭대기 부분에 잘게 쪼갠 유리조각을 촘촘히 박아놓았었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의 화려한 유리조각이 저녁 노을빛에 비치면 반짝이는 빛이 참으로 이국적이었다. 도둑 방지를 위해서라지만 담을 넘을 때 두꺼운 이불이나 담요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었고 정작 도둑들은 열린 대문이나 유리창으로 들어왔었다. 유리 외에도 쇠꼬챙이 창살이나 철조망을 담벼락 위에 설치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와 말을 하다가도 갑자기 상대방과의 사이에 거대한 벽이 등장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절대 통하지 않을 굳건한 장벽이 가로막을 때 실망하고 절망하게 된다. 트럼프가 말하는 장벽은 이러한 벽이다. 불신의 벽, 차별의 벽, 고립을 자처하는 벽이다.

상대방이 섭섭하고 미울 때마다 우리 마음에는 벽돌 한 장이 쌓여진다. 그러다 친절한 한마디에 벽돌 한 장이 무너지기도 한다. 벽돌이 쌓이면 단단한 장벽이 된다. 그런데 벽돌을 쌓는 사람도 나고 허물어뜨리는 사람도 나라는 점을 잊지말아야 한다.

2월 셋째주 월요일은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이다. 2016년 2월20일 대통령의 날에 전국적 항의시위가 일어났었다. 맨하탄 콜럼버스 서클에 모인 시위대의 구호 중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 며 스페인어, 중국어, 불어, 독일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들로 쓰인 ‘No!' 피켓이 대거 등장했다.

이민자인 우리는 미국이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을 했다. 훌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는데, 지금 미국은 훌륭한 국가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한국에서는 영영 대통령의 날이 없을 것 같은데 그나마 미국에는 대통령의 날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진정한 내 대통령을 기다리면서...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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