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비의 꿈

2019-02-08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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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환향녀(還鄕女)라는 단어가 있었다. 환향녀는 병자호란 시 중국 심양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 여성들을 이른다. 조선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청나라의 제2차 침입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이때 잡혀간 포로가 최다 60만명, 반이 여성이었다.

조선측에서 몸값을 내면 풀어주기도 했다. 문제는 돌아온 남성은 환영받았으나 여성들은 조선에 돌아와도 문중에서, 시댁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신풍부원군 장유가 진정서를 냈는데 ‘병자호란때 청군에 끌려간 며느리가 환향했다, 이 며느리와는 선조의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그러니 아들이 이혼하고 새장가 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사대부의 이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절대 불가한 일이라고 반대했고 인조도 이혼 및 재혼 불가의 명을 내렸으나 사대부들은 환향녀들을 버렸다.


문제가 커지자 나라에서는 각 마을에 지정된 강에서 여성들이 목욕을 하면 정절을 회복한 것으로 간주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조선남성들은 아내를, 딸을, 며느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정에서 내쳐진 여성들은 갖은 수모와 가난 속에 여생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왜 환향녀가 되었는가. 무능한 정권, 무능한 사대부들이 군사력을 키우지 않았고 지는 명나라, 뜨는 청나라의 시대 판세를 읽지 못한 탓이다. 당시 나라를 다스린 이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저들이 힘이 없어서, 자신들이 못나서 조선의 여성들이 그런 수모를 당했다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지난달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 운동가인 김복동(1926~2019) 할머니가 눈을 감았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4세때 공장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팔려가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로 등지에서 성노예 생활을 했다.

1947년 21세때 귀향 했으나 40년 이상 피해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공론화 한 것을 계기로 1993년 UN인권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처음 파견되어 피해사실을 증언했다. 최근 뉴욕·뉴저지 한인들은 김복동 할머니 분향 및 헌화행사에서 고인을 추모하기도 했다.

이들 위안부 출신 여성들은 가족에게도 사실을 숨겨야 했고 탄로가 나서 가족에게 버림받기도 하면서 어둠의 세계에서 50여년을 살았다. 후유증, 신경불안증, 우울증 등으로 힘들게 살아온 그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 역시 무능한 조선시대 위정자 탓이었다. 군사력을 키우지 못한 임금, 당파싸움을 하던 사대부들은 주위 나라 일본의 실체를 몰랐다. 메이지 천황이 부국강병을 통해 일본의근대화를 완성한 것을 인지 못했고 외세에만 기댄 채 이들의 야욕을 눈 감았다.

분열된 조선, 힘없는 나라의 꽃다운 조선 여성들은 나라 주인이 바뀌면서 일본정부의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청국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그 몹쓸 고초를 당할 때 조선의 남성들은 무엇을 했던가, 학대받고 천대받다가 돌아온 이들은 감싸안아주지 않고 집밖으로 내몰았다.

김복동 할머니가 마지막 가는 길에 노란 나비가 훨훨 날개짓을 했다. 나비는 위안부 희생자의 상징 생물이다. 노란 나비를 보니 중국 전국 시대 송나라의 사상가 장자가 떠오른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문득 깨어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였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라는 사람이 되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

모든 사람이 이익을 향해 달려가도 홀로 자유를 찾아 방황하던 장자였다. “현실과 비현실의 장벽은 꿈 안에서 허물어버리자, 그래야 살 수 있다.” 자유를 찾아 허허 웃는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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