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크리스마스 실의 인연

2018-12-18 (화) 나 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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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체스터 칼럼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12월에 기다리던 것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다 주시는 '크리스마스 실'이었다. 결핵 퇴치를 위한 모금의 하나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실은 은근히 수집하는 재미가 있었다. 얼추 대학 때까지 매년 모았다.

미국에 오면서 모은 실을 가져왔지만 아예 잊고 있었다. 페북의 40년지기 친구가 나처럼 어릴 때 실을 모으다 이젠 학부형이 돼서 아이를 위해 실을 오랜만에 샀다고 글을 올렸다. 갑자기 부러워졌다. 간만에 친정아버지에게 사달라고 카톡을 보냈다. 친정아버지는 뜬금없는 내 부탁에 기뻐하시며 한 장 사놓겠다고 하신다.

그러다보니 궁금해졌다. 아직도 한국에는 결핵 환자가 많은지. 알고 보니 한국은 여전히 OECD 34개 회원국 중 여전히 결핵 발생률과 사망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자살률도 1위, 노인 상대적 빈곤율 1위, 출산율은 꼴찌다)


결핵균 감염에 의한 호흡기 전염병인 결핵은 개인적으로 그리 심각한 질병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달랐다.

어느 날 결핵 환자가 입원했다. 음압격리(negative pressure room)실이 필요해서 우리 병동에 왔다. 결핵이란 걸 제외하곤 아주 건강한 환자라서 간호하기가 쉬운 환자였다. 보통 간호하기 쉬운 건강한 환자는 서로 간호하겠다고 하는데 이 환자는 다들 꺼렸다. 그 옆방에는 에이즈 환자가 있었다. 내 눈에는 에이즈 환자가 더 무서웠다. 당연히 난 결핵 환자를 맡겠다고 했고 에이즈 환자는 동료간호사가 맡았다.

그 뒤 매니저가 와서 결핵 환자 방문이 제대로 꽉 닫혀있는지, 음압의 상태가 잘 유지되는지 호들갑 떨며 확인했다. 의사들도 들어갔다 재빨리 나왔다. 에이즈 환자를 맡은 동료간호사는 결핵 환자를 맡은 날 불쌍하다고 했다. 그때 결핵이 정말 무서운 질병임을 알았다.

한국에 있는 40년지기 친구에게 결핵이 요즘도 문제가 되는 질병인지 물었다. 최근엔 탈북자들이 가진 다제내성(다양한 약제에 대한 내성) 결핵이 논쟁거리라고 답했다. 결핵은 남한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참고로 다제내성 환자 숫자도 OECD 1위라고 한다.

한국의 결핵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 결핵 감염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중학생 아들이 소아과에 갔을때 한국을 방문했다고 하니 결핵균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피부반응검사는 정확도가 떨어진다며 피검사를 처방받았고 만약의 상황을 위해서 기꺼이 검사를 받았다.

나도 병원에 다닐 때마다 일 년에 한 번씩 피부반응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이미 BCG를맞아서 거짓 양성반응이 나올 수 있으니 엑스레이 검사로 대처하겠다고 했지만 일단 검사받으라고 해서 매년 바늘에 찔렸다. 다행히 항상 음성이었다.

한국을 떠나도 한국의 질병들과 여전히 엮이고,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빠'는 날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사주신다. 내년에도 사주실 것이다.

가까이하면 위험한 결핵이지만, 크리스마스 실은 끊어내고 싶지 않은 인연이다.

<나 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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