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나의 고향 목포

1969-12-31 (수) 이혜련/테네시 내쉬빌
크게 작게

▶ 독자·문예

나는 6.25때인 1951년 전남 목포 옹근동에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기억이 난다. 목포시 죽동 OK 이발관 사거리에 우리 집이 있었다. 우물이 있어 여름에는 항상 수박, 참외, 토마토, 복숭아, 자두 등이 둥둥 떠있었다.

바로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서 꽃마당에서 의자에 앉아서 사진사가 사진 찍던 일이 생각난다. 넓은 마당에는 인상 깊은 노란 해바라기가, 칸나, 접시꽃이 있었고 수세미 열매도 있었다. 엄마 아버지가 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해남군에서 황산 염전을 했던 아버지는 해남에서 목포에 올라오면서 우리집 가정부인 20살이 안된 옥순언니에게 “혜련이 없어라”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죽동 골목길에서 팔던 따뜻한 팥죽을 사오라고 했다. 옥순 언니는 나를 업고 냄비를 들고 아버지가 준 돈을 들고가서 팥죽을 사오곤 했다. 팥죽은 따뜻하고 맛있었다. 네 살 때 먹어본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때는 전기가 없어 밤이면 호롱불을 켰다. 하루 저녁은 낮은 책상에 앉아서 무엇을 하다고 책상불에 놓인 호롱불에 앞머리를 태운 적도 있다.

유달동으로 이사가서 내가 유달초등학교 3학년때 우리 집은 다시 죽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동네에는 평화 극장 건너편 팥죽 팔던 할머니가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서 OK 이발관을 지나서 평화극장 앞에는 아이스 케키 가게가 있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운 남자아이들이 아이스 케키 상자를 메고 “아이스 케키요!”, “케키요!” 하며 악을 쓰며 장사를 했다.

외사촌 희선이와 둘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삼학도 가는 배를 타고가서 고동을 잡던 추억도 새삼 그립다. 목포사람들은 추석이면 유달산으로 모여서 유달산을 걸었다. 나도 추석이면 친구들과 송편 등 떡을 싸가지고 유달산으로 갔다.

유달산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울 때 여자들이 강강수월래를 하는 지혜를 내어 왜군이 놀라 도망간 곳이다. 엄마, 아버지와 유달산을 걸어 올라가면 절이 있었고 이 절은 큰 오빠가 서울로 대학 간다고 묵은 곳이다.

그 앞에 청기산은 작은 집 계상이 오빠가 그림을 잘 그려 그곳에서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나는 이 때 어금니가 썩어서 턱이 부어올랐다. 목포 인동외과에 가서 수술을 했는데 목에 수술 자국이 아직도 있다. 엄마는 여자 몸에 흉터가 있으면 안된다고 걱정을 했었다. 둘째 계식 오빠가 별명을 ‘몽올’이라 지어서 형제들이 ‘몽올, 몽올 하면서 놀려댔다.

외사촌 희자언니는 얼굴이 희고 예쁜데다가 말수가 적었다. 나하고 잘 놀아주었다. 희자언니는 고등학교때 발레를 하여 목포 무슨 극장인가에서 발레를 보여주었다. 그때 제일 발레를 잘 추던 학생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처음 본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골목길에는 왼쪽에 여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장사꾼들이 길에 앉아서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골목길을나오면 오른쪽에 채경이 집이 있고 그 아패는 내 친구 오빠인 생기가 살았는데 우리 둘째 오빠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

채경이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로 친할머니가 포목장사를 하는 부잣집 딸이었다. 중앙초등학교에서 늘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했다. 누구하고 결혼 했는지, 잘 사는 지 늘 궁금하다.

내가 유달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호랑이 표본이 교장실 앞에 있었고 수영장도 있었고 운동장에는 고목나무들이 하늘높이 자라고 있었다. 동물표본실에는 독수리가 박제된 것이 있었다. 학교 뒤에는 유달산 밑 상과대학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있었다.

나는 비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온 빨강 비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아버지는 본견, 연필, 고무 등을 일본에서 사왔다. 이모가 오사까에서 잘 살며 외가 식구들이 그곳에 많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과거에 그들에게 잘 대해주어 아버지가 일본에 가면 대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잠깐 광주 조선기와집에서 하숙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만난 후 엄마가 가자고 하면 아버지와 헤어지기가 싫어서 울면서 떼를 쓰던 생각도 난다.

어린 시절에는 동사무소에서 미국 치즈 등을 보급해주었다. 할머니가 보리밥을 해서 바람이 송송 들게 만든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부엌문에 걸어두셨다. 오빠들과 나는 주말에 점심으로 보리밥을 물에 말아서 치즈를 얹어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미국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음식을 먹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미국 나이로 67세이다. 은퇴한 남편은 전 산부인과 의사이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손녀가 둘이 있다. 시아버지는 목포 심산부인과 심창섭 의학박사이다. 생전의 시아버지는 회보나 회지에 글을 쓰곤 했다. 나도 유년 시절, 목포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혜련/테네시 내쉬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