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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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 의 감사

2018-11-27 (화)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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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

캐러밴’이라면 아주 옛날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이 연상되고 이국적인 낭만이 느껴진다. 밤이면 오아시스에 텐트를 치고 둘러앉아 흔들리는 불 빛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루의 피곤을 푸는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요즘 신문 지상을 장식하고 있는 ‘캐러밴’에서는 생사를 건 치열함이 전해진다. 중앙아메리카를 걸어가는 대책 없는 이민자들과 또한 명실공이 파라다이스였던 동네를 도망 나온 수 천 명의 캘리포니아 주민들, 현대의 ‘캐러밴’들 말이다.

특히 온두라스를 떠나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행렬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도망 나오던 ‘출애굽’이 연상된다. 고향을 떠나는 자들의 고난 보다는 머리가 허연 찰톤 헤스톤이 손을 번쩍 들자 바닷물이 쫙 갈라지던 그 장면에 압도되었던 어린 시절 영화. 그 후 가끔 TV에서 ‘엑소도스’나 ‘십계’를 본적이 있지만, 어릴 때 보던 그 감격은 전혀 못 느꼈다. 그러나 요새 그 영화의 장면이 새롭게 떠오른다.


남미의 캐러밴이 과연 미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벌써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람들의 건강은 어떠할까. 스마트 폰을 든 수 천 명 남미 사람 ‘캐러밴’이 마치 전설 같은 ‘출애굽’스토리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걸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아직도 걸어가고 있다. 이들이 지나는 멕시코 도시들이 항의를 한다던데, 이들의 종착지는 어디가 될런지.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나와 내 가족들이 지금 이만큼을 살고 있음을 감사했다. 인간으로서는 속수무책인 물과 불과 눈과 바람의 온갖 재난에 덫붙여 가까운 친지들의 예상 못한 사망 소식, 그리고 더욱 어눌해지시는 연로하신 친정어머니까지...

한해를 마무리하는 무드인가, 4글자 ‘생로병사’가 실감된다. 부처님이 생로병사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해 득도를 하셨다던가, 하지만 중생들은 여전히 태어나 늙어가면서 병에 걸리며 죽음을 향한 고해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나가는 일은 태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홍해바다를 건넌 사람들처럼 ‘캐러밴’ 저들이 가까스로 미국국경을 넘었다 치자, 그 다음은? 가족과 떨어진 채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불법 이민자 아동들과 그들의 부모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그나마 자기 자신이 ‘살아있음’을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풍성하고 멋진 추수감사절 디너를 계획하던 화재 피난민들도 자원봉사자들이 준비를 한 1만5,000명 분량의 터키와 펌킨 파이를 ‘월드 센트럴 키친’에서 마련한 강당에서 종이 접시에 담아 먹으며 ‘살아있음’을 감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다사다난을 잘 건너온 나의 감사기도는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물결 이루니 ~’의 풍성함 보다는, 또는 정신건강을 위해 불평불만을 버리려고 억지로 찾아보는 감사의 항목들이 아닌, 그 보다도 더 기본적인, 1660년대 미국으로 배를 타고 건너 온 유럽 사람들이 생사를 걸고 지은 농산물을 앞에 놓고 목숨이 붙어 있음을 감사했던 바로 그 감사의 기도이다.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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