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보고 듣는 세상. 눈과 귀로 확인되는 것이 있다. 반면 눈과 귀로도 알 수 없는 게 있다. 눈과 귀로 보고 들리는 세상. 그것이 모두 인 것 같으나 아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보이는 게 있고 망원경이래야만 보이고 들리는 게 있다.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의 온갖 사물과 현상이다. 그 삼라만상이 가진 비밀.
우주의 사물과 현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아주 작은 것. 중간 것. 아주 큰 것. 이 세 가지 중 아주 작은 것과 아주 큰 것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또 들리지도 않는다. 이것을 노자(老子)는 이(夷), 희(希), 미(微)로 예를 들어 설명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14장, 도기(道紀)/찬현(贊玄) 편에 나온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희. 미’는 도(道)의 비밀을 설명한다. ‘이’는 확실히 있긴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 것. ‘희’는 들으려 하여도 잘 들리지 않는 것. ‘미’는 존재하는 것 같아 잡으려 하나 잡히지 않는 것 등이다. 즉 도란 이 세 가지 성질이 뒤엉켜 하나가 되면서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게 되며 결국은 무(無)가 된다는 거다.
도는 무로 끝나는 게 아니다. 형체 없는 형체, 형상 없는 형상으로 태고 때의 도리를 함유 파악한다. 그것은 만유의 주재가 된다. 이렇듯 색이 없고, 소리 없고, 형체 없는 이, 희. 미를 노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이해하려 했다. 그러며 무상성(無商性)의 근거에서 유상성(有常性), 즉 항상 있는 것이 응시된다고 주장한다.
곤충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해본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거미. 집안에 있는 화초가 담김 화분 밑 언저리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그런데 거미는 아주 작은 거미다. 눈에 보일 듯 말듯 한 거미가 어떻게 저런 거미줄을 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거미나 아주 작은 곤충에게도 뇌가 있을까란 질문을 자문해본다.
거미에게도 뇌가 있다. 그래서 지시를 한다. 그런데 거미의 뇌, 얼마나 작을까. 그 작은 뇌에서 흡수 지시되는 모든 작용은 노자가 말하는 이, 희. 미 중 어디에 해당되는 걸까. 인간의 손에 의해 금방이라도 죽어나갈 그런 작은 곤충에게도 삶과 도(道)가 적용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가는 게 그들의 운명일까.
딱정벌레. 인간처럼 뇌와 장기가 있다. 장기는 위, 식도, 앞창자, 가운데창자, 뒷창자와 직장이 있다. 그리고 심장도 있다. 심장은 동물과 달리 등 쪽에 한 줄로 이어져 볼록한 것들이 나 있다. 뇌는 머리 부분에 작게 있는데 전대뇌, 중대뇌, 후대뇌로 나뉘어져 있다. 전대뇌는 시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 영상 처리한다.
중대뇌는 촉각을 통해 들어온 신경자극을 처리한다. 후대뇌는 식도의 일부분으로 이어져 윗입술과 앞창자의 신경자극을 처리한다. 그리고 혈액도 있는데 인간과는 달리 곤충에는 헤모글로빈 성분이 없어 붉은 색깔이 아닌 무색(無色)이란다. 무색. 피가 무색인 생명. 딱정벌레 같은 생명도 노자의 이, 희, 미와 연관이 있을까.
노자는 삶, 즉 생(生)이란 형체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죽음, 즉 사(死)란 형체를 잃는 것, 즉 형체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무상성(無商性)에 근거를 둔다. 이렇게 보면 거미와 딱정벌레 같은 아주 작은 곤충에게도 유상성(有商性)이 있고 무상성이 존재한다. 이래서 불교에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살생을 금하라 했나보다.
인간이 잣대가 되어 있는 삼라만상. 인간의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모른다고 한다. 현미경으로 보면 인간의 몸도 얼마나 많은 미생물들의 터전이 되고 있는가. 수천억, 수조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 곳이 인간의 몸이다. 결국 인간도 이런 미생물과 함께 상생(相生)해 살아가고 있는 거다.
빛이 없고, 소리가 없고, 형체가 없는 이(夷), 희(希), 미(微). 수십, 수백억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우주의 입장에서 본 지구촌과, 인간의 형체일 수도 있다. 삼라만상 속의 작은 것, 큰 것, 아주 큰 것 중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 욕심의 끝없음이여. 비록 짧은 순간을 사는 거미와 딱정벌레지만 그들은 인간을 어떻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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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