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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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나무

2018-11-23 (금)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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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으나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집을 나섰다. 평소에는 볼수 없던 것들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느껴지는 산책은 오늘도 일상에 지쳐있는 나를 위로해 줄 선물이 될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잊었다. 어쩌면 사소한 풍경에 빠져 사진을 찍기 보다는 내 감정에 더 충실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낮게 귀 기울인다는 것이 얼마나 쉽고도 어려운 일인지 길을 나서야만 느끼는 어리석음 또한 여전했다.

11월의 나무에는 묵묵히 걸어온 시간이 쌓여 있었다. 잎을 놓아 버린 텅빈 나무의 밑둥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 발치에 고스란히 쌓인 잎들은 비록 무채색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아낌없이 자신을 소진한 탓에 회한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허리가 굽은 노인이 자기보다 작은 걸음을 옮기는 아내를 부축하며 석양 속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결연함마저 보였다. 온전히 내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전전긍긍해 했던 마음은, 그래서 기운껏 움켜 쥔 두 손을 더 초라하게 했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비탈에 선 나무들이 맨 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수묵화 한 점이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흐르는 물 소리 조차 야위어 속살을 보이고, 삶은 더 헐벗은 날을 받아들이며 메말라 간다. 갈 곳도 없는 노을은 오늘도 빠른 걸음으로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숲은 그렇게 목젖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삼켜 버렸다. 오늘도 산 너머에서 온 사람들이 길을 따라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길 위에서 헤매던 텅빈 햇살도 그 길을 따라간다.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였다고 말하지만 내일 다시 그 길 위에 서 있을 것이었다. 삶은 그런 것이었다.


모처럼 일몰을 담기 위해 사진기를 들고 나섰다. 그곳에는 나처럼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간신히 벗어난 이들이 해가 지는 찰라의 모습을 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지나간 후의 하늘은 여느때 보다 맑았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러서 황홀한 노을을 기대해도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기대했던 풍경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산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다. 노을은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수평선처럼 푸르러도 구름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푸른 하늘이 저 스스로는 홀로 붉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흠집을 내는 구름이 있어야 그 빛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은 고단 했으나 자연 앞에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을까를 묻는 하루였다.

텅 빈 나무를 바라보며 우리가 안타깝다고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처연함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나무처럼 살기를 꿈꾸나 정작 그걸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음을 알기에 더 초조해 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은 지나가는 바람에 조락하여 생을 마치거나 , 또는 예기치 않게 달려드는 폭우에 쓸려 가기도 한다. 단풍으로 물들어 보지도 못한 채 푸른 잎으로 도시의 길바닥을 떠도는 것도 어쩌면 우리들의 삶과 닮아 있어 더 애처롭게 느껴지나 보다.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때를 아는 자연에서 온전히 소멸 할 때만 빚을 수 있는 빛을 꿈꾼다.

편지의 내용보다 편지를 주고 받는 행위 자체가 그 내용일 때가 있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었다. 그런 날을 건너 오면 편지는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를 무릎꿇게 한다고도 했다. 우리 들 중 누구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넘지 못할 장애물 앞에서 절망하기도 한다. 이런날에는 서로 편지 한 통 주고받는 행위가 위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우연히 펴든 책 갈피에서 지난해에 넣어 둔 가을이 툭 떨어진다. 그리고 그 책 한 귀절에 써 있던 말. ‘미안하다’를 가을이 끝난 자리에 채워 넣는다.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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