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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생활 유감

2018-11-07 (수) 유태영/원로목사·뉴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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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나에게 무척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내가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부치던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때는 9월중순경, 처음 대하는 미국의 가을 풍경은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것 뿐이었다.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은 미국의 중부 지방에 잇는 ‘세인트루이스’ 하고 하는 곳이었다. 밤늦게 목적지인 학교 기숙사에 도착한 나는 명확히 내가 미국땅에 정말로 왔는 가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동녘하늘이 밝아오자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단풍이 한창이기엔 아직 좀 이른듯한 한 때였다.

그러나 보기좋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들은 학교 뜰 안에 빽빽이 들어서 있었으며 그 나무들 사이로 다람쥐들이 바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람쥐들은 낯선 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아니하고 짐짓 반가운듯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아침 인사를 보내는 것같았다.


비바람에 떨어진 탐스러운 사과알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어도 사람들과 다람쥐들은 별로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는 이런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는 크게 감탄하였다. 머지않아 시작될 개학날을 기다리며 나는 영글어가는 미국의 첫 가을에 도취되어 긴 여행의 피곤도 잊을 수가 있었다.

울창한 캠퍼스의 숲속에는 짙은 가을 향기가 잔잔히 파도와 같이 소리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유학의 꿈이 곱게 곱게 서려져 있는 그 아름다운 단풍잎들을 바라보면서 벅찬 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내가 처음 맞이했던 그 때의 그 감격스러웠던 가을 풍경의 인상도 이제는 어언간 54년 전의 먼 추억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이에 자는 또 다시 2018년이 가을을 뉴욕에서 54번째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봄은 봄대로의 기쁨이 있고 여름은 여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봄과 여름에는 성장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에는 성숙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수확의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들의 넘기는 책장에서 상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에서 그리고 신앙인들의 경건한 기도 속에도 영글어가는 가을의 수확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분망하고 허망했던 긴 여름의 꿈이 지난 가을은 삶의 결실을 독촉한다. 가을의 문턱을 이미 우리 앞에 이르고 있다.
가을은 어딘가 모르게 한없이 그리워지는 계절, 마음 한 구석 텅 빈 것같은 계절이다. 한가로이 떠오르는 밝은 달을 쓸쓸히 쳐다보면서 속세를 떠난 심정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때가 바로 가을이기도 하다.

흰구름이 애닯게 감도는 10월의 텅빈 하늘을 쳐다보면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공명을 찾아 허둥대는 세상살이가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해주는 것이 또한 가을의 느낌이기도 하다.

뜰의 나락들은 탐스럽게 익어가는데 나는 농부와 같이 거두어 들일 열매가 별로 없으니 허전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단풍이 붉게 타오르는 정열의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거룩한 사랑의 불꽃이 한 없이 그리워질 뿐이다.

가을의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가을 같은 색깔도, 가을같은 소리도, 그리고 가을 같은 마음도 우리들에게서부터 느낄 수가 없음을 웬일일까? 다만 세월에 지친 마음 더욱 더 울적해질 뿐이다. 들려오는 소리는 기계 소리뿐이요, 고함치는 소리, 자동차 소리, 울부짖는 신음소리들 뿐...뉴욕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가을이 없나보다.
54년 전 내가 경험했던 그 벅찬 가을의 감격을 되새기면서 올해도 나는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잇다.

<유태영/원로목사·뉴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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