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눈(Eye).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물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신체의 감각기관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창구 역할을 한다. 눈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깜깜한 세상이 될게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눈을 통한 교감이 가능하기에 그럴 꺼다. 눈빛이 너그러운 사람. 호감을 주는 사람이다.
사람의 눈은 나이가 들수록 퇴화된다. 신체의 감각기관이다 보니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 그러면 무얼 하나. 안경을 끼게 된다. 도수에 맞게 끼게 되는 안경. 안경을 끼고 보면 흐릿하게 보였던 사물이 더 확실하게 보여 지게 된다. 안경이 눈의 역할을 대신해 준다. 햇빛이 눈부시게 쏘이는 날엔 검은 안경을 끼기도 한다.
검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두 검게 보인다. 인생도 마찬가지. 마음에 검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은 모두 검게 보인다. 이렇듯 마음에도 눈이 있다. 마음의 눈에 파란 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 마음의 눈에 빨간 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 파랗게 보이거나 빨갛게 보이겠지. 안경에 따라 세상은 변하니까.
1년 중 한 번 돌아오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있는 감사의 달이다. 이 달과 다음 달이 지나면 올 해도 다 간다. 슬슬 한 해의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에 있다. 지난 10개월 동안 우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나. 파란 안경을 끼고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며 살아왔나. 아니면 빨간 안경을 끼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왔나.
감사의 조건을 찾자면 한도 끝도 없다. 반대로 불평과 불만의 조건을 찾아도 한도 끝도 없다. 어느 걸 찾는 게 좋을까. 파란 안경인 긍정의 안경을 끼고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기가 만만하지가 않은 게 이 세상 아니던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람을 열불 나게 만드는 부정적인 이야기들.
차라리 뉴스를 보지 않고 사는 게 좋겠다만 그럴 수도 없다. 밖에 나왔다가 집에만 들어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틀게 되는 텔레비전.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보게 되는 뉴스시간들. 좋은 일들도 있지만 나쁜 일들도 많다. 나쁜 일들이 벌어진 소식을 접하게 되면 벌떡 일어나 끼어지게 되는 빨간 안경들.
한숨이 나오고 욕이 나오려 해도 참아야 한다. 왜, 혼자 별 짓을 다 한다 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그리고 혼자 열불 내 보아야 자신의 건강에만 해롭게 된다. 이럴 때엔 차라리 빠르게 파란 안경을 바꾸어 끼는 게 좋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세월이 지나가면 좋은 세상도 오겠지”라며.
긍정심리학(肯定心理學/positive psychology)이란 게 있다. 자신과 사회를 번영시키고자 하는 강점과 장점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능력개발상담의 한 분야로도 취급되며 개인의 행복을 촉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지니고 있다. 펜실베니아대학 심리학교수며 긍정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 교수. 그가 강론하고 있는 긍정심리학이란.
행복. 즉 파란안경을 끼게 되는 학문이다. 학습을 통해 긍정적이고 낙관적이 될 수 있다는 것. 큰 것과 양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몰입하여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좋아하는 연속극이 있을 경우. 그 연속극을 볼 수 있다는 희망. 그 것 하나 만에도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마음의 눈으로 보여 지는 세상. 감사의 눈으로 받아들일 때엔 널려 있는 공기 하나에도 감사하게 된다. 그 뿐이랴.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쪼여지는 햇빛. 이들은 너무 흔하기에 늘 잊고 사는 우리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확실해진다. 아니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파란안경은 주위에 널려 있다.
추수감사절이 있는 달이라 감사해야 함도 아니다. 자신의 행복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게 학습하는 것이 긍정심리학 논리다. 마음속이 감사로 100% 채워지면 불평불만은 차지할 공간이 제로(0)가 된다. 육체의 눈이 잘못되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마음의 눈도 마찬가지임에야.
<
김명욱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