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달새를 찾아서

2018-11-02 (금) 고명선/수필가
크게 작게

▶ 커네티컷 칼럼

뉴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관심인지 타박인지 모를 남편의 말이 심기를 거슬렀다. 스산한 바람결에 갈 곳 몰라 헤매는 차창 밖 낙엽들의 아우성이 수선스러웠다. 절정에 오른 자연의 오색향연과 눈 맞춤도 잠깐의 호사가 되었다. 풋풋했을 때는 낭만이었고 허기진 가슴도 채워주지 않았던가. 가까이서 구르는 낙엽들이 멀어질 때까지 놓아주지 못하고 애써 붙잡아 두고만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계절과의 이별이 가슴 시리다 못해 아름다운 것이기도 한가 보다. 한해도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나뭇잎이 서운하기까지 한 것이 매번 사람의 몫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남편은 나의 예전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노래를 한 곡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구르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내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누가 뒤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작은 소리로 해요. 독창하듯이 목청을 높이지 말고 합창할 때처럼 스스로 목소리를 조율하면서 가다듬어 봐요. 템포는 침착하고 느린 것이 좋고 목소리 톤은 피아니시모가 제일 듣기 좋아요. 지금은 예전의 당신 목소리가 안 나오고 있으니 찾도록 노력해 봐요.”라는 듣기에 민망한 말을 꺼내 들었다.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 남편의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자상한 성악 개인지도라고 했을 것이다. 떨어진 낙엽을 징검다리 삼아 톡톡 튕겨 다니던 시절의 목소리를 아직도 듣고 싶어 하는 남편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내 머리 위에도 억새꽃이 피고 있다. 찰랑거리던 풍성한 머리는 정수리부터 민둥산이 되어 가고 일자형 몸매는 점점 항아리 모양이 되어간다. 한겨울에도 얼음물같이 차가운 물로 목욕하면서도 열을 내릴 수 없었던 뜨거운 체질이 조금만 바깥 기온이 차가워도 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찬바람 부르는 당혹스러운 세월이 무심도 하여 가끔 마음이 겉돌고 기억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일들이 잊을 만하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이제는 그 일에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남편의 바람대로 따라 주지 못해서 속상하고 이롭지만 유쾌하지만은 않은 말을 듣고 야속해야 하는 것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생각 차이는 큰 것만 같다. 바라만 보아도 촉촉해지는 눈빛을 하고 지고지순한 순종을 원하는 남편의 바람을 내 몸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기능이 내 몸에서 사라진 느낌이다. 결혼 초에는 말수가 적다고 타박하더니 세월 흐른 지금에 와서는 목소리가 커졌다고 탓하는 남편도 변한 건 마찬가지다.

잃어가는 계절은 다시 돌아올 것인데 내 안에 키우던 고운 목소리의 종달새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을까. 정녕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지금은 시와 노래로 표현하던 사랑도 한숨으로 메우고 보랏빛 웃음도 연민으로 채워두어야 할 시기다. 얄팍한 자존심이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조금 남아있는 미색마저 젖은 낙엽으로 나뒹구는 낯선 모습이 슬퍼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늙어가는 세월의 중심에 있는 나를 나무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푸념으로 얼룩진 일상은 달게 받아들이고 우울한 순간이 찾아든들 다독이며 남은 세월 살아내야겠다. 연분홍 진달래 피는 봄날 돌아오면 나는 언덕 위에 올라 경쾌한 목청으로 하늘 수놓을 것이다.

<고명선/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